<이 리뷰는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김봉현님께서 작성해 주셨습니다.>
내게 가수 제이는 '어제처럼'이라는 곡으로 기억된다. 1998년, 뉴잭스윙 풍의 댄스곡 '굿바이'로 데뷔한 그녀는 자칫 그대로 내 시야에서 사라질 뻔했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 뭉클해지는 이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내 기억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어제처럼'이 많은 사랑을 받아서인지 그녀는 세 번째 앨범에서 '어제처럼'의 쌍둥이 곡인 '빛'을 내세웠고, 나는 이 곡 역시 좋아했던 것 같다. 글의 서두부터 새삼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번 앨범을 듣고 10년 전 '어제처럼'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분명, 그때 그 느낌이다. 그리고 그 감동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충 이렇게 요약된다.
먼저 앨범 전반에 걸친 흑인음악의 추구가 반갑다. 흑인음악 애호가로서 음악 자체가 반갑다는 뜻이다. 물론 이 앨범이 끈적끈적한 네오 소울(neo soul)이나 철저히 마니아들을 위한 알앤비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기본은 분명 흑인음악이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소리를 담아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첫 곡 'No. 5'를 플레이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알리야(Aaliyah)의 데뷔 앨범을 비롯해 90년대를 수놓았던 느릿하고 찐득한 슬로우잼이다. '끝을 말할 순 없어도' 역시 얼루어(Allure)와 112가 함께 부른 'All Cried Out' 같은 고전적인 알앤비-발라드 듀엣을 연상시킨다. 한편 정엽과 에코브릿지가 도운 '사르르'는 날 것의 부드러운 펑키 리듬 위에 두 남녀의 곡 소화력이 돋보이고, '거짓말'에 이르면 우리는 이 앨범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흑인음악과 만난다.
제이가 흑인음악을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이는 커리어 내내 꾸준히 흑인음악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녀가 가요(혹은 댄스)와 흑인음악 사이 어딘가의 애매한 지점에 계속 서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제이의 앨범들은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끼는 곡도 있었지만 그냥 넘기게 되는 곡도 있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비록 총 7곡에 불과하지만, 커리어를 통틀어 앨범 단위로서 가장 가지런하고 일관된 작품을 성취한다. 또 굳이 흑인음악이라는 장르적 테두리에 가두지 않더라도 이 앨범은 차분하고 애잔한 정서를 내내 유지하면서 통일성을 얻는 데 성공한다.
아울러 이 앨범은 제이가 자기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일종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유행을 좇지 않았다. 오히려 90년대로 회귀했다. 또한 자신의 보컬 스타일과 맞는 곡들을 추렸다. 앨범에는 가창력을 자랑하는 곡도, 울면서 소몰이하는 곡도 없다. 대신 제이의 음역대와 음색에 맞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단적으로, '널 사랑했을까?'를 다른 가수가 부르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까? 아아, 난 하지 못하겠다.
이번 앨범과 관련한 기사를 접하면서 제이가 벌써 서른 초반을 넘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놈의 시간 한번 참. 하지만 이 앨범을 들어보니 그리 걱정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제이의 음악 역시 성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2의 시작일지 모른다.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