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완서 작가 삶과 신앙
by 두레&요안나 posted Feb 01, 2011
▲ 박완서 작가의 빈소에는 그가 생전에 ‘가난한 문인에게 조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며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을 향한 배려를 알 수 있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 하늘로 돌아갔다.
진솔한 삶과 소박한 글로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것들을 위로해주던 작가였다. 그가 떠난 빈 자리에는 그의 환하디 환한 미소만이 여운을 남겼다.
국민 누구에게나 언니, 누나, 엄마, 할머니가 되어주었던 소탈한 작가,‘안티’ 혹은 ‘비호감’이라는 수식어는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작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1931~2011)씨의 빈자리다.
그의 빈소에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어 있었다. 평소 가족들에게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는 자녀들의 설명이다. 생전에 그러했듯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이들을 배려하며 자신을 낮췄다. 세상에 이별을 고하면서도 최고의 글과 훈훈한 인간애를 남긴 그로 인해 이 겨울, 한국사회가 또 한번 들썩였다.
가장 좋아한 수식어 ‘영원한 현역’
‘작가 박완서’의 삶을 되돌아볼 때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 늦깎이 데뷔다. 하지만 그가 문단의 거목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다섯아이를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 나이에 등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40년간 한치의 흔들림없이 써온 그의 글은 박씨를 ‘영원한 현역’으로 만들었다. 작은 체구에 어떻게 그런 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호하고 날카로운 시선, 내면을 드러내는 그의 글은 1970년대를 풍미한 작가도, 80년대 인기 절정의 작가도 아닌 평생 우리 곁에 남는 작가로 만들었다.
누구보다 대중적인 사랑을 많이 받은 작가였지만, 그 삶의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했지만 한국전쟁의 북새통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남편을 먼저 보내고 생떼같은 외아들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맺힌 가슴속 응어리는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욱 불을 지폈다. 야멸차고 냉정한 시선으로 물질주의, 허위의식, 세속적 탐욕에 일침을 가했다. 그의 작가적 시선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들의 일상을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갔다. 세태를 슬쩍 비틀어 보여주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이 무엇인지 자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시선을 닮아 사람들을 보았으리라.
무엇보다 떠나기 바로 전까지도 손에서 종이와 펜을 놓지 않았다. 데뷔작 「나목」 이후 전쟁의 상처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에 이어, 여성의 억압문제를 건드린 작품들, 묵상집, 소설집, 산문집 등을 끊임없이 내놓으며 세상과 소통했다. 여느 작가들이면 펜을 진작 놓았을 시기인 70대에 들어서 펼쳐낸 창작활동은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 가을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내놓았다. 생전의 마지막 책이었다.
(바오로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