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훈의 좌충우돌 노래야그-2] "임쓰신 가시관"

by Fr.엉OL가♥♪~™ posted Jul 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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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겪는 내 형제 찾아
[신상훈의 좌충우돌 노래야그-2] "임쓰신 가시관"
2011년 06월 29일 (수) 14:08:44 신상훈 grapenamu@naver.com

"고난 받는 내 민족위해 이 정열 다해 사랑케 하고,
아픔 겪는 내 형제 찾아 당신의 위안을 그에게 주리라 나의 님!"
-노래 Ecce Ego Mitte me 中

 

별일 없는 한, 일년에 두 번 보는 사람이 있다. 팔월한가위와 설날. 형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음악꼭지에 두 번째 이야기를 넣기 위해, 일년에 두 번 만나는 네째형을 만나러 간다. 중학교 시절 가톨릭교회 안으로 내 스스로 첫걸음을 내딛게 해준 것은 성서도, 교리도, 신부님의 강론도 아닌, 하나의 노래였다.

 

기타, 친구, 성가, 남성중창, 민중가요을 알게 해준, 교회 안에서 기쁨을 가져다 준, 하나의 테이프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찾으러 간다. 한 손에 우산을 다른 한 손엔, 내기억을 믿지 못하기에, 녹음기를 가지고 간다. 두시간 가량 1986~87년 서울가톨릭신학대학교에서 나온 앨범 <임쓰신 가시관>의 이야기를 써본다. 내 해석이 들어간 것이 아닌, 대화체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는다.

 

딩동!!!!
“하마냐?’’ (하마는 나의 별명이다.)
“어! 나야. 문열어!”
“비 많이 오지? 밥은 먹었냐? 어제 10게임 만에 홈런 맞았다.”
“나도 좀 껴달라니까. 그건 그렇고, 앨범에 관해 얘기 좀 해줘. 그러고 보니까, 노래만 들입다 불렀지, 그 앨범에 관해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더라고. 인터넷에 보니까 <임쓰신가시관> 테이프에 실린 노래들에 관한 얘기는 많아도, 그 테이프에 관한 숨은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오늘은 신상옥에 관한 얘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고, <임쓰신가시관> 앨범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 좀 해줘. 녹음기 가져왔으니까 자유롭게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주면 돼.”

 

지금은 나의 형수이지만, 어릴 적 나의 친한 친구였던 형수님께서 주신 커피를 마시며, 이렇다 할 저렇다 할,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내가 첫말을 꺼낸다.

“형, 그앨범이 87년 초에 나왔잖아. 낙산중창단 창단과 테이프가 나오게 된 배경 혹은 각각의 노래에 대해 얘기 좀 해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보름에 한번씩 음악거리를 주기로 했거든, 지난 번은 호인수 신부님과 김종성 신부님께서 만든 ‘유아세례를 주며’에 관한 글을 썼고, 오늘은 그 두번째로 낙산중창단 창단앨범 <임쓰신 가시관>에 관한 이야기야”

 

“그러니까, 내가 1983년에 서울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지. 그 당시만 해도 기타 메고 노래 부르는 것이 하나의 대학문화였어. 혜화동에 있던 신학교도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그런 문화를 공유했었지. 그러다가 85년에 신학생들이 만든 창작곡성가와 민중가요, 젠성가, 광주신학교창작곡, 건전가요 등등을 새롭게 편곡해서 중창형식으로 많이 불렀지. 주위에 있던 성균관대,가톨릭의대,다른 대학노래패와 대학로에서 만나서, 그곳에서 노래대회 같은 것을 했었지. 일반시민들앞에서 공개적으로 노래자랑을 하는 것인데, 아마 우리 가톨릭대학신학부학생들이 제일 잘했고, 그런 기분 좋은 자신감을 가지고 86년에 만들어진 앨범이야. 우린 그냥 재미 삼아, 선물 삼아 만든 것인데, 일파만파 입으로 입으로 화제가 됐지. 아마.”

 

“80년대에 오히려 신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 였나 봐? 보통 신학교는 군대처럼 엄숙하고 규율적인 삶을 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나 보네?”

 

“그래, 80년대 신학교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활기가 있었어. 지금도 기억 나는데, 85년인가 86년인가 학교축제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오셨는데, 우리 낙산중창단이 몇 곡의 노래를 불렀어. 근데 추기경님께서 좋았는지 신학생들에게 3박4일의 방학을 주셨지.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 그리고 그 흐름을 타고, 당시 신학교에 계셨던, 빈첸시오 활동에 열정을 지니신 김정남 신부님, 광주교구의 최창무 주교님, 수원의 최윤환 신부님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앨범이 나올 수 있었지.”

형과 나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형수는 수북이 쌓인 사진첩을 가지고 나온다. 사진을 보면서 25년전의 일들을 마치 어제일처럼 상기한다. 얘기는 계속된다. 기억이라는 것은 내가 끄집어 내는 것도 있지만, 머리 깊숙이 숨어있던 것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치고 나오는 적도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 1986년 서울가톨릭신학대학교 축제때 ‘시와 별들의 밤’/왼쪽부터, 지경대,안종수,김주용,송영호,박정우,신상옥,장광재,안홍준,곽승룡,윤종국,최호영


“형 이 사진은 언제야? 사진 속 사람들은 기억이 나?”
“야! 이땐 나도 젊었는데…다 기억 나지. 아마 86년 5~6월이였던거 같아. 학교 축제기간 중에 낙산중창단의 노래발표회였던거 같아”
“낙산중창단은 어떻게 만들어 진 거야?”
“우리 때 음악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어. 내 한 반 밑에 최호영 신부(現 가톨릭대학교 음악부교수)도 있었고, 두 반 밑인 기타 잘치는 안종수도 있었고, 노래 잘하는 같은 반 지경대를 비롯하여 18명정도 모집을 했지. 말이 모집이지 나와 이상필, 최호영 신부가 돌아다니면서 ‘너 해’ ‘너 해’ 그런식으로 뽑았지. 정식으로 낙산중창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을 한 것은 1985년이였던 거 같아. 아까도 말했듯이 학교축제라든지 대학로 노래경연이라든지 신부님들 은경축, 금경축, 사제수품식 노래등등 많은 활동을 하면서 지금의 낙산중창단의 꼴을 갖춰진 것 같아.”

 

“그럼, 당시 활동만 하다가 갑작스레 앨범 녹음을 하게 된 건가? 신학생 신분으로 꽤 힘들었을 거 같은데. 연습할 시간도 없고, 앨범작업이라는 것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그렇다고 신학생들이 자유롭게 녹음실을 오며 가며 할 수는 없잖아”
“그랬지.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몇분의 신부님의 후원도 있었고, 당시 신학교 분위기는 자유로움이 더 컸던 거 같아. 1986년 5월인가? 당시 신학생이였던 권오륜 신학생의 권유로 강남에 있던 이용복스튜디오에 갔지. 13곡을 들고, 하지만 녹음실력이 못 미쳐서 훗날을 기약하고 다시 신학교로 돌아왔다가, 2학기 기말시험을 며칠 앞두고 다시 녹음을 하러 갔지. 1986년 11월에. 그리고 두 시간 만에 녹음을 마치고 신학교 통금시간에 맞춰 급히 돌아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하얀색 표지의 <임쓰신 가시관> 앨범으로 만들어졌지. 앨범은 이용복씨가 무료로 만들어줬어. 개신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왕자> <꽃들에게 희망을>.. 이 두 권의 책이, 내 삶을 긍정의 힘으로, 버팀목이 되 주는 책이라면, 1986년 늦은겨울에 만들어진 <임쓰신 가시관> 테이프앨범은 수많은 삶의 길 중, 음악이란 것을 알게 해준 앨범으로 기억된다. 최소한 나에게는…형과 함께 노래 하나하나를 스케치한다.

“테이프 속에 있는 노래 좀 설명해봐. 창작곡도 있고, 대중가요도 있고, 젠성가, 영화음악, 민중가요도 있잖아? 이 노래들은 저작권 혹은 허락을 맡고 녹음이 된 건가?”
“그때 그런게 어딨어. 판매목적도 아니였고, 그냥 신학교 학생들에게 선물용으로 만들었지. 그러다가 군대갔다오니까 전국에 엄청나게 퍼져있더라고, 그리고 전국 어디에 가든 우리가 만든 노래가 불려지는 걸 보고 뭉클했지. 처음에 기념앨범이였어. 많은 이들이 이 테이프를 사고 싶어했지만, 법적으로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공개적으론 판매할 수 없는 앨범이야. 당시에도 돈주고 사는 것보다 학교 차원에서 선물로 많이 줬던 거 같아. 판매를 했으면 많은 수입을 올렸을 걸..”

 

“<임쓰신 가시관>과 <Ecce Ego Mitte me>는 형의 곡이잖아. 이곡부터 설명 좀 해봐”
“원래 <임쓰신 가시관>은 다른 곡의 삽입곡이였어. 내가 만든 곡 중에 <사명>이라는 곡이 있어. <사명>은 1984년에 만들었지만, 발표는 수원가톨릭대학교에 들어간 후 갓등중창단 1집(1990년)에 수록을 했지. 클래식으로 말하면 <사명>이라는 곡은 네가지 테마로 만들어졌지. 그중 마지막 테마가 ‘임이 가신 그길을 나도 간다’라는 의미를 가진 희망의 테마였지. 하한주 신부님 글에 내가 곡을 부친 거지. 1985년 신학교 축제때 <사명>을 불렀는데, 신부님들과 신학생들이 마지막 테마인 지금의 <임쓰신 가시관>을 다 좋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그 곡을 많이 부르고 다녔고, <Ecce Ego Mitte me>는 1980년대에 대학에 퍼져있던 사회개혁 교회개혁의 내용을 담아 만든 노래야. 1986년 신학교 축제 주제곡이기도 하고. 직역을 하면 ‘주님! 나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소서’라는 뜻이지.”

 

“형 그 노래 듣다 보면 중간 테너솔로에 일명 삑사리 나잖아. 그거 다시 녹음하지 그랬어. 그 솔로 한 분은 평생 후회하고 민망했을 텐데…”
“규복이? 나랑 같은 반 이규복이 그 노래 솔로였어. <Ecce Ego Mitte me>는 제일 어려웠기 때문에 맨 마지막으로 했어. 중간중간 계속 틀려서 8번 녹음을 했지. 학교 통금시간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 거야. 결국 마지막 녹음을 했는데, 한번도 틀린 적이 없던 규복이가 틀린 거야. 근데 다시 할 수가 없었지. 시간이 없었거든. 학교에 뛰어서 들어갔어. 근데 난 그 부분이 제일 재밌고 기억이 나”

 

“형. 교회 안에서는 <임쓰신 가시관>이 많이 불려졌다면, 교회 밖에서는 <꽃들에게 희망을>이 마치 동요처럼 사회적으로 많이 불렸었지. 나도 중고등학교때 친구들에게 직접 가르쳐주기도 했고, 가사를 음미하며 책도 읽고 했었지. 최근에 내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노래를 개인적으로 부르고 싶어서 이곳 저곳 김용진 씨를 만나보려고 해도 연락처를 도저히 알 수 없는 거야. 혹시 연락되나?”
“나도 잘 몰라. 나보다 신학교 2~3년 선배인데, 내가 알고 있는 선배들도 연락이 안된데…그 노래는 내가 신학교 들어오기 전부터 불리던 노래야. 신학생들 사이에서. 당시 84학번이던 최호영 신부가 <꽃들에게 희망을><내마음><태양의찬가>를 편곡했지. 감성적으로 풍부했거든, 노래도 잘하고. 나머지 곡들은 내가 편곡하고, <태양의찬가>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노래이기도 했고, <영산강><터>는 그 당시 의식가요 혹은 민중가요라는 이름으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불렸고, <다리><하느님은 사랑이니>는 젠성가로, 종교의 일치와 화합을 말하고 있지. <저하늘 높이>는 광주신학교에 다니던, 지금은 부산교구 윤용선 신부의 곡이고, <스핑크스의 전설>과 <갈매기의 나라로>는 상민이형(내 둘째형)과 친구들이 인하대 노래패에서 만든 노래잖아. 부천시 심곡부활성당에서도 많이 불리던 노래지. <The Exodus>는 영화 ‘영광의 탈출’ 출애굽에 나오는 테마음악을 합창곡으로 편곡한 노래야. 그당시 해방신학이라든지 자유, 민주, 해방이라는 사회적 흐름속에서, 신학생들과 학교도 동참을 했지. <내마음>은 이정선이 만든 대중가요고…”

한 시간 가량 얘기를 나누고 보니 배가 고프다. 짜장면과 잡채밥을 시킨다. 인터뷰 요청을 한 터라 내가 계산을 한다. 큰돈 만원을 낸다. 젓가락 질을 하다 내가 말한다.

“형,근데 표지그림과 악보는 누가 한거야?”
“표지그림은 그,…누구더라…그 시인의 형인데? 저항시인이 누가 있지?”
“김지하?…김남주?….”
“아니…저기… 지금 농사짓고 공동체 만들어서 활동하는 신부님인데..이름이???”
“예수살이공동체? 박기호 신부?”
“아 맞다! 박기호신부님이 표지그림을 그렸어. 그리고 그 신부님 동생인가 형인가 박기평이라는 본명을 가진, 박노해 시인이고.”
“아! 그렇구나!”
“악보는?”
“내 같은 반 친구 윤종국 신부가 그렸어”

간단히 짜장을 먹고 우리만큼 늙어간 사진을 본다. 다른 이야기를 한 시간 가량 나눈다. 그리고 필요한 사진을 고른다. 집을 나오면서 흩어져있던 노래와 노래에 얽힌 기억들을 하나 둘 긁어 모은다. 십 분간 걸어가다가 문득 사진을 놓고 온 것을 알고 형의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형, 사진!”
“여기 있다. 죽기 직전에 삶을 안다고…술 한잔 하자! 들어가!” ……"응! 형수 갈게!"

이 앨범은 공식적으로 음반판매장에서 구할 수 없는 앨범이다. 1986년 서울가톨릭대학교 낙산중창단이, 여러 문화운동에 관심을 지닌 이들과 더불어, 그들과 함께 살던 친구,동료에게 선물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테이프는, 가톨릭 CCM에 새로운 문을 열게 해주었다. 교회 안에 새로운 노래들이 198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있듯이, 그 해 여름도 한국사회엔 뜨거운 여름이 오고 있었다. 오늘은 그 노래를 들어보자.

 

마지막으로 2009년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제목으로 만든 내 블로그의 주소를 링크해 본다.
http://grapenamu.blog.me/80069161496  

 

 

낙산 중창단 창단앨범 1987년 <임쓰신 가시관> 

*세월이 흐른 탓에 이름이 틀릴 수도
혹은 명단에 빠진 이가 있을 수도 있음을 이해바랍니다.

   
제1테너-신상옥,지경대,이성원,안종수
제2테너-안홍준,이규복,장광재,김주영
제1베이스-송영호,박정우,이상필,정봉
제2베이스-최호영,윤종국,곽승룡 
바이올린:박정우, 기타:신상옥,안종수
 
 
 
 
-신상옥
1983년 서울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입학
1990년 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입학
前 생활음악연구소 소장
現 한국 찬양사도 협의회 회장
現 영소리 방송국, 작은예수회 음악감독
앨범: <그큰빛주님되어>1993년,<그때가 이르자>2000년 외 다수 앨범.
대표곡:임쓰신가시관,내발을씻기신예수,신상옥미사곡,그때가이르자
 
    ♣ 임쓰신 가시관

  ♣ Ecce Ego Mitte me

  ♣ 꽃들에게 희망을

 

 

 

 

   

신상훈 / 현재 한국가톨릭문화원 음악팀장으로 활동. 서강대 철학과 졸업. SBS 효과실 음악감독(1998~98년). '신상옥과 형제들' 창단멤버(드럼, 1992년). 연극 및 무용극 음악작곡. 2011년 안중근 기념 연극작품 <그대의 봄> 음악감독 및 작곡. 무용극 <그대 흘러라 기쁨의 강물이 되라> 음악조감독.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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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편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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