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를 가까이하고 받아들일 때 부유한 이도 이해하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by 인아델라 posted Oct 31, 20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언젠가 시골 공소에 갔다가 도시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내려와 살고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곧 서품 받을 아들을 두었다는 그 형제는 세속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는 분이었습니다. 우연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분이 취기가 약간 오르자 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 사제가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면 부자도 이해할 수 있지만, 부자를 먼저 이해하면 가난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가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부자의 영혼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부자들과 어울린다고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과 함께할 때 부자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오래 전 만남이지만 그분의 말이 잊히지 않고 마음에 박혀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오늘날 교회는 이미 신자본주의의 물질적 우상이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 말에 따르면 부자들만이 교회의 현실이 되고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관념 속에 머물러 있을 때, 교회 안의 세속주의는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줄 때, 비로소 복음의 의미도 교회의 존재 이유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를 가까이하고 받아들일 때 부유한 이도 이해하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달리, 가난한 이들은 직접 찾아 나서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 소유로 신분의 경계를 짓지만, 교회는 복음적 가치로 그 경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매일미사 묵상글 옮겼습니다.

 

얼마전에 전신자 기차여행을 갔습니다.500명 예상의 700명신청 엄청난 호응이었습니다. 일일여행비는 1만원이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탁구대회를 하고 있습니다.  선수로 나올 수 있는 교우가 없어 기권한 구역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기권입니다

교회의 행사는 정말로 어려운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더 많은 사람이 참가할 수 있는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봤습니다.   일일 기차여행은 탁월한 선택어었다면 탁구대회는 뭔지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묵상글을 보니 생각나서 몇자 적어봤습니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