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 안의 벽
우리 밖의 벽
그 벽을 그토록
허물고 싶어 하던 당신
다시 태어난다면
추기경이 아닌
평신도가 되고 싶다던 당신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이 땅엔 아직도
싸움과 폭력,
미움이 가득 차 있건만
봄이 오는 이 대지에
속삭이는 당신의 귓속말
사랑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리고 용서하라
그리고 그 역할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와 국가 전체, 전 인류 공동체로 확대된다. 우리가 만든 벽은 우리를 가둔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자신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나 그 벽을 허무는 데 일생을 바치신 분으로 내게 다가온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실천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 법정스님, '김수환 추기경을 떠나보내며' -
편집자
겨울을 나기 위해 잠시 남쪽 섬에 머물다가 강원도 오두막이 그리워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며칠 세상과 단절되어 지내다가, 어제서야 슬픈 소식을 듣고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고 망연자실해졌다.
추기경님이 작년 여름부터 병상에 누워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 또한 병중이라 찾아뵙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기도를 올리며 인편으로 안부를 주고받았었다. 그런데 이토록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나시다니!
그분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를 삶 속에 그대로 옮기신 분이다. 나와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다시 태어나면 추기경 같은 직책은 맡고 싶지 않다. 그냥 평신도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써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다.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한 이 나라, 이 아름다운 터전에 아직도 개인 간, 종파 간, 정당 간에 미움과 싸움이 끊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진다. 이러한 성인이 이 땅에 계시다가 떠났는데도 아직 하느님의 나라는 먼 것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단순함에 이른 그분이 생애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준 가르침도 그것이다. 더 단순해지고, 더 온전해지라. 사랑은 단순한 것이다. 단순함과 순수함을 잃어버릴 때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분이 더없이 존경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이다. "사람은 결코 나면서부터 단순한 것은 아니다. 자기라는 미로 속에서 긴 여로를 지나온 후에야 비로소 단순한 빛 속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하느님은 단순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느님께 가까워지면 질수록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있어서 더욱더 단순하게 되어간다. 그래서 완전히 단순하게 될 때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오래도록 살아 계실 것이다. 위대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그분의 평안을 빌기 전에, 그분이 이 무상한 육신을 벗은 후에도 우리의 영적 평안을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도 봄이 오는 이 대지의 숨결을 빌어 우리에게 귓속말로 말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리고 용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