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판 쉰들러('좋은 글' 중에서)

by 두레&요안나 posted Feb 1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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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여름,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오자 많은 유태인들이 리투아니아로 피난해 왔다. 이미 리투아니아의 각국 영사관에도 퇴거명령이 나와 있었다. 유태인들은 다시 여기서부터 다른 나라로 탈출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비자가 필요했다. 그들이 찾은 곳은 일본 영사관이이었다. 절망적인 그들에게는 그곳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스기하라 영사는 본국 외무성 장관 앞으로 암호전보를 쳤다. 그러나 장관으로부터는 비자를 발급해주지 말라는 답신이 왔다. 독일과 협정을 맺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측 비위를 건드릴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기하라 영사는 다시 두 차례나 탄원의 전보를 쳤다. 회신은 같았다. 겁에 질린 채 영사관앞에서 서성거리는 유태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이틀밤을 고민했다. 그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저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며 본국 훈령을 거역하고 비자를 발급해 주기로 했다. 그는 리투아니아를 퇴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식사도 걸러가며, 유태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그는 6천명의 유태인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스기하라는 당연히 외무성에 복직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에게 사직을 요구했다.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스라엘은 스기하라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었고, 미국에서는 그의 덕분으로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뉴욕에서 감사의 모임도 가졌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도 한복판의 큰 거리를 스기하라거리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스기하라는 1986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채 세상을 떴다. 많은 유태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그가 자신의 조국에서 명예를 회복한 것은 세상을 떠난 지 7-8년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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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아님 방송 하긴 마지막 방송 ...
아니 마지막이라고 쓰지 않을께요.
마지막은 제일 슬픈 말이에요
그럴서 언제가는 비아님도 만날수 있을걸라 생각해요,
늘 방송 하실놓라 진짜루 수고 하셨습니다,
언제가는 비아님도 뵐수 있을수 있기를 바래요
04.사랑해그리고기억해(나무자전거)
이곡은 제가 비아님께 선물 신청이에요
08.나의 고백(Song 연광흠)(포 3집)
이럴게 두곡 청해요
비아님도 건강하시고 늘 언제나 주님 안에
행복 하시길 바래요,,,

?Who's 두레&요안나

profile

찬미예수님 요안나입니다,
저는 광주 교구 송정2동 원동 본당에
다닌  신자인 요안나입니다,
여렸을때 신동에 다녔다가
현제는 원동에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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