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man Citadel

by Fr.엉OL가♥♪~™ posted Feb 2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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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성 [Jebel Al Qaala, Amman Citadel]

 

KR_caccm_IMG_0006.JPG 

< 4~5천년의 역사를 지닌 암몬성은 로마시대 헤롯대왕이 헤라클레스를 위해 봉헌한 신전과 비잔틴시대의 교회 터, 우마이야 왕조 때 축조된 성과 주거지흔적 등 중요한 고고학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기 위에 헤라클레스 신전의 남아 있는 부분이 우뚝 서 있습니다. 기둥이 서 있고 보가 올려져 있죠? ^^ >

 

성경에 거인 골리앗을 돌 몇 개로 이겼다는 다윗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하느님을 잘 섬긴 왕이지만 한 가지 잘 못한 일은 수하에 있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게 하기 위해 남편 우리아를 전쟁에 나가게 해 죽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곳이 우리아가 전사한 라빠성, 요르단의 암몬성이라고 합니다.

 

KR_caccm_요르단 - 암몬 성 002.JPG 

 

암몬성에서 내려다보면 암몬 시가지가 보이고, 로마시대 때 만든 로마 원형극장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가치가 무척 높다고 합니다. 그 옛날 암만의 동쪽 언덕 바위산을 깎아서 만든 것으로 대략적으로 6,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객석 어느 위치에서건 무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공연장을 꾸며 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공연장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KR_caccm_요르단 - 암몬 성 003.JPG

 

 

암몬성은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투에서 다윗왕의 계략으로 그의 충신 우리야가 전사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유적지 안쪽에는 1951년에 세워진 요르단 고고학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데, 사해사본(Dead Sea Scrolls)과 선사시대부터 AD1700년대까지 출토된 유물들을 시대별로 전시해 놓고 있다.

암만시는 2010년 새해를 맞아 암만의 대표 명소인 암몬성 유적지(현지명; 자발 알 깔라아)를 새롭게 단장했다.

4~5천년의 역사를 지닌 암몬성은 로마시대 헤롯대왕이 헤라클레스를 위해 봉헌한 신전과 비잔틴시대의 교회 터, 우마이야 왕조 때 축조된 성과 주거지흔적 등 중요한 고고학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KR_caccm_IMG_0005.JPG 

 

라빠는 옛 암몬족의 도시로 오늘날의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과 동일시되고 있다. 다윗도 라빠를 정복하고 암몬족을 지배하였었다.(사무 하 12,26. 29 ; 역대 상 20,1)

 

모압 지역의 경계는 서쪽은 사해, 동쪽은 사막지대, 남쪽은 제렛 강, 북쪽은 아르논 강이나, 성경은 종종 모압 북쪽의 예리고 맞은편 평지를 일컬어 '모압 벌판' 라고 부른다. (민수 21,12-15, 20, 22:1, 여호 13,32)

산지는 주로 해발 900 미터 이상 되는데, 이러한 고산 지대는 겨울철에 풍부한 습기로 인해 포도와 농사에도 적절할 뿐만 아니라, 좋은 목초 지를 형성하여 목축에도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모압 땅의 환경으로 인해 “모압 임금 메사는 목축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임금에게 어린 양 십만 마리, 그리고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열왕 하 3,4)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바쳤다.

 

 

1) 너는 칼이 암몬인들의 라빠로 갈 길과, 유다와 요새 예루살렘으로 갈 길을 그려라. (에제키엘서 21,25)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암몬 자손들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저희 영토를 넓히려고 길앗 여자들의 임신한 배를 갈랐기 때문이다. 전쟁의 날, 함성이 터지는 가운데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날,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내가 라빠 성벽에 불을 지르리니 그 불이 성채들을 삼켜 버리리라. (아모스 1,14)

 

3) 주민은 롯의 자손,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맏딸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모압족의 조상이다. 작은딸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벤 암미라 하였으니, 그는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암몬인들의 조상이다.”(창세 19,36-38).

 

4) * 주민의 성격이 잔인무도하여 싸움을 좋아한다.
“암몬 사람 나하스는, “내가 너희 오른쪽 눈을 모두 후벼 내어 온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내놓는다는 조건 아래 너희와 계약을 맺겠다.” 하고 대꾸하였다.”(사무 상11,:2)

 

* 원수의 눈을 빼는 일과 잉태한 여인의 배를 가르는 일을 한다.
“암몬 자손들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저희 영토를 넓히려고 길앗 여자들의 임신한 배를 갈랐기 때문이다.”(아모 1,13).

 

5) 유대인들은 두가지 사건으로 이 족속을 미워한다.
* 이스라엘 백성의 통과할 도로를 빌려주지 않았다.
*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다(신명 23,4).

 

6) 솔로몬의 아들 가운데 르하브암의 어머니 나아마는 암몬 여인이었다 (왕상 14:21).

 

7) 이 족속은 일곱신을 숭상한다.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열왕 상 11,5).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록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열왕 상 11,7)

 

 암만은 현대의 하시미트 요르단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의 수도로서 행정부와 왕궁(까스르 라가단 : Qasr Raghadan)이 자리하고 있으며,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고대 근동의 주요한 고대도시의 하나이다.

 

구약시대 “암몬의 라빠 성읍”(신명 3,11)' 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물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9천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라빠' 란 단어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 란 의미를 지닌다.

 

이곳 라빠가 역사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3세기 암몬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였다. 라빠를 중심으로 했던 암몬 왕국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었다. 두 나라는 적대적 경쟁 관계여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암몬 왕국은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 4백년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암몬' 은 롯의 후손(창세 19,38)들로서 '나의 백성의 아들(벤 암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가나안 진입과 관련하여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민수 21,24-35 ; 신명 2,19-37) 이 시기에 암몬은 이미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으며 그 경계는 견고하였다. (민수 2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라빠 동쪽의 아로에르까지를 가드 자손에게 분배하였다. (여호 13,24-28)

암몬 족과 이스라엘 족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에서 사울 왕까지 이르는 판관시대 동안(1,200-1.025 B.C.) 암몬 족들은 모압의 에글론왕과 동맹을 맺고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여리고를 18년 동안, 에훗에 의해 퇴각될 때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판관 3,12-31)

 

판관 입다의 시기(삿 11,1-12:7)에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사울왕 때(기원전 1,025년경)에 암몬왕 나하스는 요단강 서편지역 ‘야베스 길앗’까지 침입해 들어왔다.(사무 상 11) 다윗의 암몬 정벌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사무 하 10,1-14)

솔로몬(c. 970-945 B.C.)은 “파라오의 딸뿐 아니라 모압 여자와 암몬 여자, 에돔 여자와 시돈 여자, 그리고 히타이트 여자 등 많은 외국 여자를 사랑하였고”(열왕 상 11,1), 그들의 영향으로 암몬 사람의 우상 몰록을 따르고(열왕 상 11,5),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신전을 지었으며, (열왕 상 11,1. 7)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 즉 르호보암 왕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로 암몬 사람이었다. (열왕 상 14,21)

여호사밧 왕(876-849 B.C.) 때, 모압과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역대 하 20장) 우찌야왕(785-740 B.C.) 때에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 (역대 하 26,8) 요담왕 때는 암몬을 다시금 정벌하여 통치를 강화하였다. (역대 하 27,5)

 

알렉산더 이후 라빠 암만은 기원전 259년에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통치되면서 '필라델피아' 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되는데, 이는 프톨레미 2세의 이름인 '필라델푸스(Philadelphus, 283 -246 b.c.)' 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제논 파피루스에서는 이 도시를 '비르타(Birta)' , 즉 '성곽 거주지' 라 불렀다. 기원전 21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이 성을 포위하고 수로를 차단하여 정복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부터 점차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한 나바테안 때문에 오랫동안 지배하지 못하였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야나이가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이 성을 점령하고 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필라델피아는 로마 시대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시가 되었으며, '비아 노바 트라야나(Via Nova Traiana)' 의 중심지로서 홍해와 다마스커스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기원 후 4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비잔틴시대에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주교가 있는 요단강 동편 지역 교회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니체아 공의회(AD 325)와 칼체돈 공의회(AD 451)에 대표를 보내기도 하였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세워진 성 엘리야 교회와 성 조지 교회는 6세기에 가장 잘 알려진 교회였다.

 

635년 아랍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움마야드 시대(661-750)를 거쳐 압바시드(750-969), 파티미드(969- 1071), 십자군(1099-1268), 마멜룩(1263-1516), 오토만(1516-1918) 시대를 지나 영국 위임 통치 기간동안 자치 정부를 인정받은 요르단 왕국이 독립한 이후 요르단의 수도로 선택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르단 최대의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정치, 경제적 전략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지금은 인구 1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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