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님추모시

by 아침향기 posted Jan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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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고 박완서 추모의 글>

1. 고인의 시  

+ 시를 읽는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이런 사람 만났으면

보름달처럼
뭉게구름처럼
새털처럼
보기만 해도 은하수 같은 이.

풍랑으로 오셔도
바닷가 도요새 깊은 부리로
잔잔한 호수 위 빗살무늬 은물결처럼
초록의 싱그러움 잊지 않는 이.

그래서
자신의 잣대를 아는 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
잠자는 영혼 일으켜 세우며
눈빛만 마주쳐도 통하는 이.

그래서 같이
여행하고 싶은 이.
(박완서)


2. 추모의 시

+ 꽃이 된 기도 - 이해인 수녀

엄마의 미소처럼 포근한 눈꽃 속에
눈사람 되어 떠나신 우리 선생님
고향을 그리워한 선생님을
그토록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흙 속에
한 송이 꽃으로 묻고 와서 우리도 꽃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을 더 깊이 사랑하는 꽃
선생님의 인품을 더 곱게 닮고 싶은
그리움의 꽃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시어 더 든든하고 좋았던 세상에서
우리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울고 울어도 눈물이 남네요

선생님은 분명 우리 곁에 안 계신데
선생님의 향기가 눈꽃 속에 살아나
자꾸 새롭게 말을 걸어오네요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 세상을 위로하는
미소천사로 승천하신 것 같다며
이 땅의 우리는 하늘 향해 두 손 모읍니다

'갑자기 오느라 작별인사 못했어요
너무 슬퍼하면 제가 미안하죠
거기도 좋지만 여기도 좋아요
항상 기도 안에 만납시다, 우리'
선생님의 초대에 행복한 오늘
한 마음의 평온함으로 인사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는 엄마별이 되어주십시오


+ 추모 기도 - 이해인 수녀

사랑의 하느님
오늘은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깊은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참으로 많이 사랑하였고 많이 사랑받아 행복했노라고
겸손히 고백해온 우리의 어머니를 받아주십시오
흐르는 눈물이 강이 되고 녹지 않는 그리움이 얼음꽃으로 피어있는
우리 가슴 속 깊디깊은 슬픔도 헤아려 주십시오
황망히 먼 길 떠나느라 일일이 작별인사 못하여
가슴에 파랗게 멍이 들었을 우리 어머니의 마지막 침묵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더 애절하고 애틋한 봉헌기도로 받아주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느님, 늘 약자를 배려하고 손 잡아주셨던 어머니처럼
우리도 언제나 속이 깊고 마음이 넓은 애덕의 사람들이 되도록 은총 베풀어주십시오
헤어짐의 슬픔을 그저 울고 또 우는 것으로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우리의 나약함을 굽어보시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성인의 통곡 속에 더 아름답고 더 꿋꿋한 믿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셔 주십시오
우리의 감은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생명의 하느님
진실하고 따듯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한 생을 마감한 우리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지요
근심도 고통도 없는 지복의 나라에서 편히 쉬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조금만 사랑해도 우리 마음에 고운 길을 내어 주시는 놀라움 고마움 새로움의 향연
아직도 끝나지 않을 우리의 기다림
앞으로 이어질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도의 마음이 피워내는 꽃으로 봉헌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어머니를 보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토록 행복하게 해 주셨던 어머니 고맙습니다
우리의 사랑 속에 안녕히 가십시오 어머니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선생님 '나목'으로 서 계시지 말고 돌아오소서 - 정호승 시인
    
선생님
아침에 일어나 흰 꽃잎처럼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눈송이 사이로 한 송이 눈송이가 되어
선생님 떠나가셨다는 소식 너무 놀랍습니다
유난히 추운 올 겨울 혹한이 선생님껜 그토록 혹독하셨습니까
일찍이 이 시대의 '나목'이 되어
문학의 언어로 위안과 행복의 열매를 나누어 주셨는데
이제 또 어디 가서 한 그루 '나목'으로 서 계시려고 하십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차산 아래 뜰도 거니시고
봄이 오면 피어날 꽃 이야기도 하시고 고구마도 드시고
마더 테레사 수녀님께서 좋아하신 초콜릿도 드셨는데
선생님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심으로써 저희를 버리십니까
저랑 봄날 햇살 아래 점심 드시기로 한 약속 잊으셨습니까
가슴에 묻으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아드님 뵙고 싶어
서둘러 가셨으리라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뵙고 싶어 서둘러 가셨으리라
선생님 문학의 뿌리인 어머니 만나 뵙고 싶어 더욱 서두르셨으리라
미루어 생각해도 생각해도 눈물이 고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영원히 불혹의 작가이십니다
아직도 쓰셔야 할 소설이 흰 눈 속에 피어날 동백처럼 숨죽이고 있습니다
못 가본 길이 그토록 아름다우십니까
좀 늦게 가보시면 아니 되옵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이라고 하신 선생님 말씀
제게 힘과 위안을 주신 그 말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아, 어떠한 고통도 극복하려 들지 말고 견뎌야겠구나
가슴 깊이 새기고 열심히 노력하고 실천해왔는데
선생님께서는 또 무엇을 견디시기 위해 그토록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소복소복 눈 내리는 아침 눈길을 그토록 걸어가고 싶으셨습니까
'휘청거리는 오후' 표지를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새색시처럼 살짝 웃으시던 그 수줍은 미소 잊혀지지 않는데
선생님
이 눈 그치면 시장 보고 오신 듯 돌아오세요
돌아오셔서 저희들에게 '이제 한 말씀만 하소서'
선생님께서도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이제 그리움을 축복처럼 생각하겠습니다
전쟁과 분단과 이산의 아픔이 없는 천주의 나라에서 다시 쓰신 소설
열심히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국문학의 영원한 모성이신 선생님
한국소설문학의 맑고 밝은 햇빛이신 선생님
천주 품안에서 평안하소서
(정호승·시인, 1950년 대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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