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를 보며....<아베 피에르 신부님 일대기>

by 촌사람 posted Jan 2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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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빈민구호단체 엠마우스의 창시자 아베 피에르 신부의 일대기>...<영화 Hiver54>

 

진리의 빛

인간은 밤바다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와 같다.

복음과 교회는 바닷가에 있는 등대와 같다.

그것의 위치는 완벽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정되어 있다.

그것은 계시와 교리의 엄정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멋들어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등대가 꺼져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배는 암초에 좌초하고 말것이다.


등대의 정확한 위치는 우리의 책임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등대가 사랑의 온기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추정되는 우리들 모두에게 달린 일임을 절대 잊지 말자.

온 인류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진리를 밝히는 이 빛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피에르 신부  Abbe Pierre 〈단순한 기쁨〉 중에서 -



--------실제 피에르 신부님과 배우 랑베르 윌슨의 모습

          <-------실제 모습 배우와 닮았지요..--------->



 


"Tant qu’il existera la misère, aussi longtemps que régnera l’exclusion,
NOUS NE CONNAITRONS ni la paix de l’âme, ni la paix, ni la joie du cœur !” [L'abbé Pierre]



“사회적 비참이 존재하는 한, 이 비참에 대한 침묵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어떠한 영혼의 평화도,평화도,마음의 즐거움도 알지 못할 것이다” – 아베 피에르 -




 

그는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약했고, 지난 1949년에는 세계적 빈민구호단체인 ‘엠마우스’를 만들어
평생을 헐벗은 이웃들의 수호자로 헌신했다. 소신과 신앙이라는 무기로 세상의 불합리와 불평등에 맞서
전사처럼 싸워온 휴머니스트다.



그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변함없는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여론조사를 통해서 증명된다.
일요판 신문 ‘주르날 뒤 디망슈’와 여론조사기관 IFOP는 1988년 이래 매년 두 번씩 프랑스인들이 선호하는
인물 50인을 선정, 발표해왔다. 이 조사에서 아베 피에르는 줄곧 최상위권에 들었을 뿐 아니라,
무려 17회나 수위를 차지했다. 이 정도면 아베 피에르를 위한 인기투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12년 프랑스 제2 도시 리옹의 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다섯째인 앙리 그루에는 15세 때
신의 계시를 받고 18세가 되는 해 수도원에 들어갔다. 1938년, 26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이후 군복무를 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베 피에르’라는 호칭은 이때부터 쓰였다.
종전과 함께 해군 군목(軍牧)이 된 그는 1945년부터 6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정치라는 것은 다름 아닌 ‘누구에게서 돈을 얻어 누구에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아베 피에르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50년 전, 1954년 2월이다. 그해 겨울, 프랑스에는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쳐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추위에 동사자들이 속출했다. 특히 많은 빈민들과 거처가 없는
노숙자들의 희생이 컸다. 그중에서도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집 없는 한 여인이 동사한 사건은 아베 피에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밤새 추위에 견디다 못해 유명을 달리한 이 여인의 손에는,
자신이 살던 다락방의 집세를 내지 못해 받은 퇴거명령 서류가 쥐어져 있었다.



아베 피에르는 1949년 엠마우스회를 창설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전흔이 도처에 남아 있는 프랑스에는
굶주리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수가 줄어들 줄 몰랐다. 파리 근교 자신의 거처에서 이들을 받아들이던 아베 피에르는
더 넓은 장소에서 더 많은 소외된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방법을 강구하게 됐다. 결국 넝마주이들과
건축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이 공동체는, 자신들의 노동으로 얻은 수익을 통해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임시 거처를 직접 만들어주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이후에도 1994년, 빈집 점거운동을 전개했고,,


[지난 94년에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무주택자 126명과 함께 파리시내의 5층짜리 빈 건물을 무단점거했다.
그리고는 “집없는 사람이 80만명에 이르는 반면 빈 가옥은 200만채나 되는 모순이 어디 있느냐”고 일갈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 벌어진 이 사건은 당시 선거의 쟁점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약삭빠른 정치인들이
즉각 무주택자 대책을 들고 나온 것이다. 대선에 나선 자크 시락 파리 시장이 파리시내의 빈 건물을 강제 징발해
무주택자들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자 피에르 신부는 따끔한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왜 진작에 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는가”라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2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아파트에 대해
중과세하는 법안이 제정됐고, 세입자들이 월세를 내지 못하더라도 강제로 퇴거시키지 못한다는 법이 통과됐다.]



2003년 12월 27일, 가톨릭계 일간지 라크르와(La Croix) 기고를 통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빈부격차 심화를 경고하기도 했다.



[아베 피에르는 동일간지 지면을 빌어 '지금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불행하다'고 개탄하며 공해에 제동을 걸 줄 모르는
'눈먼 대통령'은 '기업의 우두머리'들만 살찌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터무니 없는 격차' 그리고 '절망하지 않는 자'들의 끝없는 이민 행렬 등 사회 빈곤을 야기시키는 요인들을 일일이 열거했다.


이어서 '프랑스의 불행은 매년 2십만 가구가 파산하고 또 이들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이라고
지적한 아베 피에르는 정부의 사회 예산 삭감 의사에 우려를 표시하며 "우리에게 여전히 시간은 있다.
이것은 전쟁이다!"라는 말로 궐기할 것을 선언했다. 1954년 2월 1일 그가 벌인 '선의의 반란' 이후 전개된 노숙자 주거 문제를
전면에 드러낸 이번 선언을 아베 피에르는 빈곤에 맞선 '정당한 반란'이라 역설했다.


'프랑스에 3백만 인구가 당치 않게 좁고 편의시설조차 없는 집에 기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생존 보조급여가
취소되는 것을 누가 납득하겠는가’라고 아베 피에르는 역설하며 '빈부격차와 정부의 망동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독일이나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예산 감축 단계에 있는 프랑스 정부를 성토했다.




피에르 신부는 2007년 1월 사망했고, 그의 유언은  "인간의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허락된 짧은 순간" 이라는
마지막 가르침 이었다.
그 옛날 예수님 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다 내게로 오라”고 외쳤다.
그리고 피에르 신부는 예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프랑스 우파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그가 사망했을때, 그에대해 “끝없는 존경”을 표하며
“우리는 훌륭한 인물, 양심, 미덕의 화신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피에르 신부의 죽음


1월22일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 94년간의 삶 마쳐

▣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koreapeace@free.fr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굳이 완벽해야 하는 건 아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아베 피에르 신부가 선종했다. 1월22일 새벽 5시께 파리의 ‘발 드 그라스’ 병원에서
94년간의 성스러운 삶을 마쳤다.

그리고 이틀 뒤 대중에게 문을 연 ‘발 드 그라스’ 성당 앞에는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그렇게 1~2시간씩 기다리더라도 성당 안으로 들어가 피에르 신부에게 마지막 애도를 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아베 피에르신부(1912~2007년)


“내 무덤에는 꽃이나 화환 대신, (앞으로) 집 열쇠를 가지게 될 수천 명의 (무주택) 가족과 아이들의 목록을 가져다달라”고
그래서 평소 말하던 피에르 신부는 “꽃 살 돈으로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했다고 한다.
래선지 신부의 유품인 베레모와 지팡이만 오롯이 관 위에 자리하는 아주 검소한 빈소에는 그 자리를 찾은 익명의 수많은
남녀노소들의 눈에 영근 눈물 꽃이 화려한 화환을 대신했다.


피에르 신부와 가까운 이들은 벌써 몇 년 전부터 그의 임종을 준비해왔던 터였다. 하지만 신부의 임종 뒤
“피에르 신부의 임종으로 프랑스 전체가 충격을 받았고 슬프다”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말처럼, 신부의 임종 소식은
오랜 병환 뒤에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처럼 프랑스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신부-레지스탕스-국회의원을 거쳐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에 이르기까지, 피에르 신부의 삶은 내면적으로 심오한
구도자의 것인 동시에 온갖 장벽에 맞서 현장에서 직접 싸웠던 활동가의 그것이기도 했다.


1949년 전직 목수이자 자살을 기도했던 어느 살인자에게 피에르 신부가 “죽을 작정이라면,
죽기 전에 나랑 같이 남을 돕자”면서 같이 첫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에마우스 자립 공동체’의 출발이었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피에르 신부는 세비를 고스란히 갖다바치고도 사사로이 빚까지 내어 공동체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럼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나날이 불어나는 공동체이다 보니, 재정난에 부딪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재정난 타개에
보탬이 되기 위해 그가 시작한 활동은 넝마주이였다. 소비활동의 소외자들이 소비사회가 버린 쓰레기를 뒤져서
건진 물건들을 팔아 집을 짓는 자재를 마련했다. 이런 전통은 ‘재고품 수거’로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주며, 인간의 존엄성을 무엇보다 존중하는 것이
피에르 신부의 신념이자 에마우스 공동체의 정신이다.


1953년 정식으로 에마우스 협회가 결성됐고, 1954년 겨울 전례 없는 혹한으로 노숙자들이 목숨을 잃어가던 상황에서
피에르 신부의 ‘친구들이여 도와주세요’라는 라디오 선언과 더불어 에마우스는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런 연대의 전통에 기반해 세워진 에마우스는 사회에서 버림받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절망을 자재로
희망을 건설해가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공동체’이기도 하다. 1971년에는 ‘국제 에마우스 협회’가 발족돼
현재 전세계에 걸쳐 4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350여 개, 프랑스에만 110여 개의 에마우스 공동체가 건설돼 있다.
그 외에도 1988년 피에르 신부 재단이 설립돼 극빈자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앙심을 잃은 적이 없다는 피에르 신부는 자유로운 동시에 충직한 인물이었다.

‘세상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강한 자들로 향하는 길이며 그건 욕망이고 전쟁이다.
다른 하나는 약한 자들로 향하는 길이며 그건 바로 평화다.’ 피에르 신부는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는 시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시인은 죽어도 시는 남는 것처럼, 성인은 숨졌지만 그 정신은 남게 되기를.

 

【외신종합】 세계적 빈민구호단체 엠마우스의 창시자 아베 피에르 신부가 22일 파리 발 드 그라스 군 병원에서
폐 감염으로 선종했다. 향년 94살.

한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이들 자립을 위해 헌신해온 피에르 신부는 '빈민의 아버지'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
프랑스 양심의 상징' 등으로 불리며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프랑스 언론이 실시하는 여론조사에서 피에르 신부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가장 좋아하는 인물' 단골 1위다.


1967년과 93년 두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피에르 신부는 67년 방문 때 한국 엠마우스 창설의 디딤돌을 놓았다.
이후 75년 당시 명동본당 주임이던 고(故)김몽은 신부가 서울 영엠마우스를 창설해 국내에도 엠마우스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다. 또 피에르 신부는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 「단순한 기쁨」 「신부님, 사람은 왜 죽나요?」 등 여러권의
저서를 통해서도 국내에 알려졌다.


1912년 프랑스 리옹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피에르 신부는 부유하고 편한 삶을 포기하고 1930년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해 1938년 사제품을 받았다. 본명은 앙리 앙투안 그루에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며
사용했던 암호명 '피에르 신부'를 평생 사용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하원의원에 당선돼 6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대변했다.


1949년 창설된 엠마우스는 피에르 신부가 살인을 저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한 살인범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피에르 신부는 살인범에게 "죽기 전에 나를 도와주시오. 당신이 도와주면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 한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설득하여 파리 교회에 있는 낡은 건물을 수리해 노숙자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고
자립공동체 엠마우스를 만들었다.


피에르 신부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9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노벨 평화상 후보로 여러번 거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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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재개발 반대를 외치다 진압과정에서 둘아가신 모든 영혼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서울시의 뉴타운 개발은 결국 가난한 서민들은 주거할 곳이 없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부자들과 여유있는 사람들만 사는 동네를 건설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인가 봅니다.
서민들은 자꾸 도시의 주변 외각으로 내보내는 정책들.
우리정부는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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