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4219 추천 수 0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지거 쾨더 신부의 성화 묵상


십자가의 길



 




제1처 사형 선고 받으심 (내맡기심)



그림에서 예수께서는 가야파와 빌라도 앞에 서 있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권력구조의 대표자들이다.
가야파는 토라 두루말이를 꽉 붙잡고 있는데, 그것이 그에게 성스러운 하느님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만에 찬 찡그린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빌라도가 있다. 이는 심각한 종교적 갈등에 빠져들어간 세속적 권력을 대변한다.
빌라도는 이 갈등을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걸치고, 빌라도는 "무죄"의 물에 자신의 손을 씻는다. 대야의 물이 핏빛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다. 이것은 그가 이 살해모의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살해공모에는 종교 지도자와 세속적 권력자의 손은 함께 협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판관들 앞에 상체를 드러낸 채 고개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걸친 옷의 붉은 색은 왕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긴다"(이사 50,5-6)는 말씀처럼 내 맡겨진 자세이다.  






제2처 십자가 지심 (껴안으심)



채찍질 때문에 피를 흘리는 예수의 손이 십자가를 잡고 있다. 그 손은 들보를 껴안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지거 쾨더는 십자가의 길에서 시간을 넘어선 다른 강조점을 부여한다. 가로 들보 위에 무거운 철 갈고리가 걸려있다. 그리고 가로 들보와 평행하게 처형장으로 이어지는 레일이 있다 철길은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제3처 첫 번째 넘어지심 (모퉁이의 머릿돌)




 




제4처 성모님을 만나심 (아무 말 없으심)


성모님과 예수님의 꼭 잡고 있는 두 손은 격려와 확인 부드러운 어루만짐을 보여주며, 십자가를 가운데 둔 두분은 이미 두분이 아니고 한분이다. 하나로 묶여진 같은 운명을 암시한다.





제5처 시몬이 함께 십자가를 짐 (일치)


시몬은 예수 앞에서 십자가를 운반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진다. 이로써 시몬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일깨워준다. 두 얼굴은 얼마나 닮았는가! 얼굴 생김새, 눈, 코, 입, 수염 등 이 두 사람이 혼동될 정도로 비슷하다. 다만 푸른 옷을 입은 사내는 얼굴에 자기 일의 색채를 띠고 있다. 붉은 옷의 사내는 창백한 얼굴에 모욕당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뒷면에 있는 그들의 팔은 서로 교차되어 상대방의 몸을 감싸고 있다. 그들은 함께 하는 일로 서로 얽혀있는 살아있는 십자가이다. 두 사람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 시몬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되었지만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나는 여기 있는 내 형제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와 연대하겠습니다. 우리 둘이 짊어질 겁니다. 서로 부축하며 짊어질 겁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들의 고통에 깊이 관여했다. 나는 이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 그리고 시몬, 그대는 나의 길을 함께 갈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통 당하는 인간, 즉 "십자가를 진 사람"과 연대한다.






제6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림 (진정한 icon)


베로니카(Vera Ikona, 이 이름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합성어이다)라는 이름은'진정한 형상'을 의미한다. 그녀의 수건에 고난받는 자의 얼굴이 찍혔고 이 그림은 어떤 사명을 전하고 있다. 베일 뒤에 있는 여인의 눈은 계속 끌려가는 예수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흑인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빈 대접을 들고 음식을 구걸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 양식이 필요하다. 온정에 대한 간청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서 그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제7처 두 번째 넘어지심 (우리와 함께 하심)




 




제8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돌보심)




 




제9처 세 번째 넘어지심 (아멘!)


잿빛 하늘, 태양은 십자가 위를 비추고 쓰러져 계신 예수님 얼굴을 비추고 있다.
아무도 지나가는 이 없고 우는 여인도 없고 아무런 위로도 없이, 예수님은 부셔지고  홀로 계시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6)






제10처 옷 벗김을 당하심 (누구의 것?)



"위에서 아래까지 이은 곳 없이 통으로 짠" 예수의 하얀 옷가지가 색상이 화려하고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한 조각"으로 된 예수의 이 속옷을 놓고 병사들이 제비를 뽑았다. 이 속옷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나눌 수 없는 교회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 그림에서는 예수의 옷가지 주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된 세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앞쪽에 금빛 나는 제복을 걸친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있고, 그의 옆쪽으로 검은색 가운을 걸친 프로테스탄트 목사가 있으며, 그의 맞은편에는 진홍색의 주교관과 옷을 걸친 로마가톨릭 주교가 있다. 이 세 사람 모두 함께 숭배하면서 예수의 옷 한 조각을, "그들"의 조각을 잡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유산에서 "그들"이 지니는 몫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핏빛처럼 붉은 깃발을 든 검은 피부의 사람이 이 경건한 전원적인 풍경을 망치고 있다.  
"성의"(聖衣)에 흐트러지고 쪼개지는 십자가 형태로 찢어진 틈이 보인다. 분리된 채 있는 종파의 아픔...





제11처 십자가에 못박히심 (마주 바라봄)


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한다.
팔다리를 뻗고 십자가에 누워 예수님의 눈으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 그 하늘에서 죽은 검은 태양이 그를 내려다본다. 화환 형태의 얼굴들이 누워있는 자, 다시 말해서 나를 내려다본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갑옷으로 무장한 로마 병사가 망치를 격렬하게 내리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즐기면서도 깔보는 히죽거림 외에, 깊이 생각하는 표정도 찾아볼 수 있다. 당황하는 표정도 있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있으며, 슬퍼하는 표정도 있다. 어떤 사람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또 어떤 사람은 성서 두루말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예언들이 그에게 암시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찌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제12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희생 제물)


그림은 피흘리고 매맞은 비참한 예수님. 머리는 어두움을 향하고 턱은 늘어져있다 양옆은 성전의 휘장이 찢기는 모습인데, 마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께서 양쪽 담을 허물고 있는 강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율법을 부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기" (마르 2,27) 때문이다.  








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모태)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온 것과 같이 어둠도 위로부터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마리아는 절망과  슬픔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저항한다. 한 손으로 그녀는 아들을 세우고 그의 버팀목이 된다. 마치 그녀가 아들이 아기였을 때 똑바로 세우고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그의 숙여진 머리는 더 이상 똑바로 설 수가 없다. 피가 넘쳐흐르는 그의 머리는 무겁게 가슴에 안겨 있다. 그의 눈은 감겨져 있다. 그는 마리아를 더 이상 바라 볼 수 없다. 안겨있는 예수님의 자세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 있었던 아기의 자세이다. 그리고 예수의 등에는 노아의 홍수 때, 방주로 돌아 온 비둘기처럼 부리에 올리브 잎을 물고 있다. 이것은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다. 그의 죽음이 세상을 구원하였다는 증거의 표지이다. 마리아의 초록색 외투는 말씀에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표상이다. 즉 절망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교회 구성원들의 믿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개의 해골에서 어두운 눈구멍이 그림 감상자를 쳐다본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1이하). 이런 연관성이 두 개의 해골(아담과 하와)로 암시되었다.
교부들의 전승에 따르면, 골고타는 아담의 무덤이라고 한다.  






제14처 무덤에 묻히심 (누에 고치)


우리는 어두운 공간, 즉 바위 무덤 안으로 인도되어진다.
수건으로 싸매어진 예수가 있다. 그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붕대에 배어있다. 이 사람이 정말로 몇 시간 전에 죽은 그 처형당한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그렇지만 캄캄해야 할 무덤 안에서 이 사람의 몸은 빛을 내고 있다.
죽은 자의 머리 위쪽에서는 부활의 신비의 빛이 강렬하게 반짝이고, 조심스러운 표징 속에서 부활의 신비를 볼 수 있다.
약한 빛이 앞쪽으로 굴려진 돌 사이를 통해 무덤 안으로 스며든다.죽음은 더 이상 삶의 끝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시작이다.


+ + +


Sieger Koder는 1925년 1월 3일 독일의 바쎄알핑겐에서 태어났다. 2차대전 중,그는 프랑스로 파병되어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포로로 억류되었다(1944-45년).자유의 몸0|된 그는 1951년까지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예술 학교에서 조각과 은 세공 기술을 배운 뒤 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튀빙겐 대학에서 영어학을 배웠다. 그 뒤 12년 동안, 그는 예술가로 직접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가 1971년에 사제가 되고 1975-1995년까지 호한베르크와 로젠베르크에서 교구 사제로 활동한 뒤 지금은 은퇴하여 슈투트가르트에서 멀지 않은 엘반겐에서 살고 있다.



지거쾨터의 십자가의 길 영상보기 

                                                                                                                                              출처: 디트로이트 성 김대건 한인 천주교회 홈페이지에서

  • ?
    여름그늘 2009.04.04 05:24
    이나시오 피정때 흑백 그림으로 묵상했는데 원본은 칼라인가 보네요.
    흑백보다 좀 무섭네요^^
    14처 무덤에 묻히심 앞에서  깊은 마음을 담아 기도를 해봅니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