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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Solemnity of the Body & Blood of Jesus
Corpus Domini
13 giugno (celebrazione mobile) - Solennit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이다.
이날은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첫 목요일이나 주일에 지내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일에 지내고 있다.
이 축일은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 때부터 공식적으로 지내기 시작하였으며,
성체 축일과 성혈 축일을 따로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함께 기념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미사 동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도록 다짐합시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1247년 리에즈에서 몽 꼬르니용(Mont-Cornillon)의 복녀 쥴리앙(축일:4월6일)이라는 한 수녀의 열성에 의해 처음 드려졌다.
1208년 환시 중에 주님께서 제대의 성체성사를 공경하는 연중 축일이 빠져 있음을 자신에게 알려주셨다고 그녀는 말하였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리에즈의 주교와 특히 후에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된(1261) 쟈끄 빤딸레옹 대부제가 이 계시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오르비에또(Orvieto) 근처 볼세나(Bolsena)에서 일어난 성체성사 기적에 감명 받은 우르바노 4세는 1264년,
오르비에또에서 교서 "Transiturus"를 반포하는 가운데 새 대축일을 제정하였으며,
이 대축일은 성령강림절 팔부 다음 목요일에 성체성사를 기념하여 지내게 되었다.
쥴리앙은 몽 꼬르니용의 한 젊은 수사에게 새 축일 시간전례 기도문을 만들 것을 부탁하였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까지 사용되고 있는, 교황의 교서에 함께 붙어 있는 시간전례 기도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근대의 연구는, 이 축일을 위한 미사와 시간전례 기도문은 성 토마스가 만든 것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경향이다.

교황이 새 축일을 서방 교회 전체가 지키도록 자신의 권위로 명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이 축일은 "새 대축일"이라 불렀다.
또한 성체성사 축일, 하느님 축일, 지극히 고귀한 성사 축일, 그리스도의 몸과 피 대축일로도 불렀다.

우르바노 4세가 새 축일을 세운지 두 달 후에 죽은 까닭에 그의 교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클레멘스 5세(1311-1312)와 요한22세(1317)가 이 교서를 새로 확인한 다음에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 전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이 축일을 진작시킨 세 교황 가운데 성체 행렬에 대해 언급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러 지역에서는 빠스카 아침 지성소의 그리스도의 "무덤"에 빨마 가지를 든 채 성체를 모시고 행진하거나 또는 성대하게 성체를 옮겼다.
본래 의미의 성체 행렬(성체 거동)은 13세기 말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풍습은 14, 15세기에 퍼져나갔다.
로마교회는 15세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홈에서) 성체성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 깊은 신비에 도달하려면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여 믿는 것이 이르고, 더 나아가 믿는 것을 실행하여야 한다.
’보이는 것’이란 빵과 포도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물질적인 빵과 포도주를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신다.
주시고 받는 양쪽의 행위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계약을 암시한다.

’믿는 것’이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미리 보여 주신 제사이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표징으로 인류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주시며 당신의 파스카에서 온갖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빵을 나눌 때마다, 당신을 내주시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제대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성사의 현존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믿는 것을 실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삶은 인간 존재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
여기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하나 되고, 믿음과 삶은 다르지 않다는 체험을 입증하게 된다.

복음서가 전하는 성체성사의 제정은 예수님의 죽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앞당겨 거행한 성사적 표징이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다.

이것은 새로운 계약의 예고이며, "흠 없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날인될,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실현하는 성사가 될 것이다 .

◎ 알렐루야.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사는도다.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의 보증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희망과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실 때마다 희망을 갖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잔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매일미사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1

그리스도의 몸
1) 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3)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6-9).

5)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1디모 6,16),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18).
6)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요한6,63)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7)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8) 이 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들도 단죄받습니다.
10)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14,22.24).
11) 또한 말씀하십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12)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13)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11,29).

14) 그러니 "한다한 사람들이여,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가지렵니까""(시편 4,3).
15)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요한 9,35).
16)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17)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18)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19)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肉)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20)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21)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22)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하고
당신 자신이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
출처 : 작은형제회홈,가톨릭대사전

성체 聖體
라틴어 Eucharistia
영어 Eucharist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속에 실제로, 본질적으로 현존(現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말한다.
어원적으로는 희랍어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의 본래의 뜻은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에 감사함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는 성체에 대한 많은 예표(豫表)들이 나오는데 창세기 14장 18절의 ’떡과 술’의 표현이 그 한 예이다.
또한 예수는 스스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하셨으며,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고린 11:23-25)을 통하여
성체성사(聖體聖事)를 설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체에 대한 확신은 예수의 강력한 말씀에 근거하므로 성체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성체는 미사 중 성찬의 전례 부분에서 축성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해져 한 가지 신비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우선 성체는 세상 끝날까지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실재적’이며 ’신체적’인 현존이다.
또한 성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즉, 미사성제를 통해 이 희생이 계속됨으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는 사랑의 일치를 보여준다.
즉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영혼의 초자연적 생명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성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피다"(마태 26:28)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혈은 사도시대 이래로 신자들의 흠숭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특히 성체성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미사 때 봉헌되는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로 변화되어 포도주의 외적 형상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과 마찬가지로 성혈을 받아 마심으로써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게 된다(요한 6:54-56 참조).
성혈에 대한 신심은 전통적인 것으로서 특히 교황 글레멘스(Clemens) 6세(재위: 1342-1352)는
그리스도의 피는 성자와 함께 결합되어 있기에 너무나 귀중하여
단 한 방울의 피로써도 모든 인류의 속죄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1849년, 교황 비오(Pius) 9세는 7월의 첫 일요일을 성혈 축일로 지정하여 모든 교회가 지키도록 했으며,
1914년 교황 성 비오(St. Pius) 10세는 축일을 7월 1일로 변경시켰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성혈 축일을 성체 축일에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즉 삼위일체 주일 후의 첫 목요일이나 첫 일요일은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이름으로 기념한다

최후만찬 :
예수께서는 공생활 3년을 마칠 무렵 그 당시의 관습대로 예루살렘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하셨다.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셨다,
그것은 평소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루가 22:15).

예수께서는 ’만찬 도중에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시다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식사를 마치시고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하시며 마시도록 권하였다.

이로써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새로운 계약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것이다.
사도들에게 파스카 축제를 같이 하기로 한 이유는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한 새로운 계약에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그들 제자들로 하여금 ’이 예(禮)를’ 영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미사성제(성체제의)는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이고 천상의 파스카 잔치의 전신인 것이다.

구약의 파스카와 신약의 파스카(최후만찬)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확실해진다.
구약의 파스카- 어린양의 희생 · 양고기(음식) · 양의 피(해방의 표시) · 노예생활에서 해방(육체적)
신약의 파스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 · 그리스도의 몸(빵, 음식)
그리스도의 피(포도주, 새로운 계약) ·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영생)
이렇게 비교해 볼 때 구약의 파스카와 신약의 최후만찬은 형태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파스카는 상징적이고 현세적 생명을 말하며 신약의 최후만찬은 실체적이고 영생을 위한 것이다.
또한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완전한 해방,
즉 죄와 죽음에서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약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희생되시고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영적 양식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신약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혈제를 피 흐르지 않는 제사
즉 빵과 포도주의 형태 안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것이 바로 미사성제(성체성사, 성체제의)이다.

십자가의 희생과 미사성제 :
성체의 제전은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이 예를 나를 기념하기 위해 행하여라"란 말씀으로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까지
세상 어디서든지 사랑과 신뢰와 신앙으로 성체의 제정을 행하여 왔다. 이 성체제전은 미사성제이다.

십자가의 희생은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의 대사업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봉헌했기 때문에
봉헌자도 그리스도이시고 제물도 그리스도이시다.

남을 위해, 남의 속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제물은 참다운 봉헌이고 참다운 제사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위대한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성교회 안에,
특별히 전례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성제에 있어서 특히 성체 형상 안에 현존하시지만,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즉 "전에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같은 분이, 지금도 사제들의 봉사를 통하여
제사를 봉헌하고 계시는 것이다"(트리엔트 공의회 제22차 회의,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 제2장).

이렇게 미사성제에 있어서도 제물도 제관도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사람인 사제는 다만 그리스도의 도구인(道具因)일 뿐이다.
십자가상의 희생이나 미사성제는 방법상 다를 뿐이지 인류 구원과 속죄의 제사임에는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태어난 나자렛의 예수.
공생활 3년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시던 예수,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어 성부께 영광을 받은 천상의 예수,
빵과 포도주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는 다만 한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라고.
그러나 그리스도는 혼자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성부께 데리고 가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자기와 같이 사람들을 성부께 데려가기 위한 가장 뛰어난 사업이 성체성사의 제정이다.
그래서 성체는 성부께로 가는 길이다.

성체는 우리를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로 돌아가게 하는 성사이고,
구원사업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완전히 실현하는 성사이다.
그리스도 즉 우리들의 사제이시고 중개자이시고 우리들을 위한 제물이고 길이신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서
성부와 우리를 만나게 하신다.
성체성사는 다른 모든 성사의 정점이요 완성이다.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사랑 길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


우리가 영화 모짜르트의 인생을 작품화한 아마데우스 영화를 한번쯤 보았을 것입니다.

Ave verum corpus( 성체 안에 계신 예수 )도 역시 그안에 나왔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속에서 느끼는것은 상당한 전율과 탄성 그리고, 우리가 한번쯤 고민하고 묵상해야할 예수님의 성체에 대해

같이 느끼고자 이 작품을 올립니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 모차르트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성체 성혈대축일을 어느 날에 거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곡을 완성한 6월 17일은 축일 즈음이었으리라 짐작한다. 1791년의 부활절은 4월 24일이었고,

요즘 식으로 계산하면 성체성혈대축일이 목요일인 경우 6월 16일, 주일인 경우 6월 19일이 된다.

그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모차르트가 이 곡을 완성한 날은 축일과 근접해 있다.

죽음을 6개월 앞두고 있는 작곡가의 마음에 성체의 의미가 특별히 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래글은 허영한 교수님이 잡지에 기고하신글입니다.

설명이 잘나와 별도의 설명없이 인용하겠습니다. 자세히 읽어보시면 이해가 쉽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앨범자켓은 Leonard Bernstein &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의자켓입니다

이자켓에 이곡이 연주되어 있으면, 곡 역시 이자켓에서 발췌해서 올립니다.

 

모차르트의 ‘성체 안에 계신 예수’

글 허영한

1791년 12월 7일, 비엔나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최고의 작곡가로 칭송받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안장되었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명곡을 남긴 이 작곡가의 최후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지듯이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모차르트는 큰 부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음악과 사랑하는 부인 콘스탄체가 그의 위안이었다.

그나마 콘스탄체도 모차르트 곁을 늘 지켜주지는 못했다. 자주 병을 앓았던 그녀는 바덴의 온천을 좋아했으며,

그녀가 온천으로 떠나면 모차르트는 홀로 남아 작곡과 연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장 짧은 명곡의 탄생 서양음악 역사상 가장 짧은 명곡이 바로 그 온천 도시인 바덴에서 탄생했다.

바덴의 학교 선생이며 성당 지휘자였던 안톤 쉬톨과 모차르트는 가까운 사이였다.

모차르트는 부인이 바덴으로 가기 전에 호텔 예약 등을 쉬톨에게 부탁하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명곡 ‘성체 안에 계신 예수’는 바로 안톤 쉬톨에게 선물로 준 곡으로 알려져 있다.

1791년 6월 17일, 온천에 머물고 있던 아내를 만나려고 며칠 전에 바덴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별 생각 없이 이 곡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이 곡의 자필 악보에는 별다른 수정 흔적도, 연주를 위한 지시사항도 거의 없다.

곡 전체가 3분밖에 안 되는 마흔여섯 마디로 된 이 곡이 어떻게 이토록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니는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Ave verum corpus, natum 성체 안에 계신 예수

de Maria Virgine, 동정 성모께서 낳으신 주

vere passum, immolatum 모진 수난 죽으심도

in cruce pro homine, 인류를 위함일세.

cuius latus perforatum 상처입어 뚫린 가슴

unda fluxit et sanguine. 물과 피를 흘리셨네.

Esto nobis praegustatum 우리들이 죽을 때에

in mortis examine. 주님의 수난하심 생각게 하옵소서.

 

이 찬미가는 14세기부터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믿음을 노래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찬미가는 성체강복과 성체거양 때 불렀다. 그래서 요즘 이 곡을 영성체 성가로 노래한다.

가사는 대체적으로 원어 가사에 충실한 편이다(“가톨릭 성가” 194번 참조). 다만 첫 행의 ‘아베(ave)’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만세’에 해당한다. 따라서 첫 행을 직역하면 ‘만세, 성체여!’가 맞을 것이다.

3행과 4행은 다소 의역되었는데 “모질게 고통받고 희생하셨네,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라 할 수 있다.

또한 마지막 두 행을 다소 무리하게 직역하면 “우리를 위해 먼저 맛보셨습니다, 죽음의 시험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사용하는 마지막 두 행은 심한 의역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이 곡은 현악합주와 오르간이 반주하는 4성부 혼성합창으로 되어있다.

관악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오르간이 가세하여 음향의 풍부함을 더하고 있다.

빠르기는 아다지오, 곧 느리게 진행하며 첫 두 마디는 반주 악기만으로 연주한다.

합창단은 ‘만세’를 두 번 노래하며 시작한다. 여기서는 승리의 분위기보다 경건함이 우선이다.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은 첫 여덟 마디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여기에 대단한 작곡 기법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다. 작곡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화음만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단순한 화음으로 이런 선율을 만들었는지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저 감탄할 뿐이다.

다음 여덟 마디는 다소 복잡해진다. 고통을 표현하려고 음들이 조금 뒤 틀리다가 ‘십자가에서’를 뜻하는 ‘in cruce’에서

소프라노만 노래하고 나머지 성부는 잠시 멈춘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방법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음(요한 19,34 참조)을 노래하는 부분이다.

음들이 고통스럽게 움직이며 화음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묘사한다.

성가대 경험이 있는 분들은 이 부분을 부르기 힘들었으리라 짐작한다.

노래하는 우리도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이어서 마무리하는 음악이 시작한다.

마지막 부분은 지금까지와 사뭇 다르게 시작한다. 이때까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같은 리듬으로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부분에서 여성과 남성이 둘로 나뉘어 여성이 먼저 시작하면 남성이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서로 리듬이 엇갈리며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가 분리되어 들린다. 여기서 ‘우리(nobis)’가 나온다.

예수님의 희생이 바로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음을 기억하는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합창단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마지막 어구인 ‘죽음의 시험을(in mortis examine)’ 노래할 때 선율들이 다시 한번 고통스러워하며

마무리한다.

앞의 ‘십자가에서’를 노래하는 부분과 비교하면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십자가와 죽음을 음악적으로 유사하게 처리하여 서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 모차르트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성체성혈대축일을 어느 날에 거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곡을 완성한 6월 17일은 축일 즈음이었으리라 짐작한다.

1791년의 부활절은 4월 24일이었고 요즘 식으로 계산하면 성체성혈대축일이 목요일일 경우 6월 16일, 주일일 경우 6월 19일이 된다.

그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모차르트가 이 곡을 완성한 날은 축일과 근접해 있다.

죽음을 6개월 앞두고 있는 작곡가의 마음에 성체의 의미가 특별히 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허영한 요셉 - 서울대 작곡과, 뉴욕시립대 대학원(CUNY) 음악학 박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교수.

[경향잡지, 201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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