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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0 22:40

Matthäus Passion (Philippe Herreweg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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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거룩한 성주간의 특집 2편입니다.

예고한바와 같이 이번엔 Matthäus Passion 을 2회에 걸쳐 나누어 해설해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이곡은 연주만 3시간 걸리는 대작입니다. 성서의 내용 그대로 대화체로 음악을 구성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꼭 필요한 음악중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지루하시더라도 끝까지 내용을 한번쯤 읽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음악 역시 CJ분들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합니다.

Herreweghe, Chapelle Royale, Collegium Vocale Gent - Bach St Matthew Passion.jpg

 

[성주간 특집]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수난곡 이야기 _ 마태수난곡
 
 
수난 이야기를 극음악으로 연주하는 전통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가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일단 오페라와 오라토리오가 등장한 이후 옛 전통이 이들 장르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17세기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대본작가와 작곡가들이 점점 더 복음서 가사에 자유롭게 만든 아리아와 명상,
복잡한 오블리가토 파트를 덧붙이게 되었다. 많은 작곡가들은 대중이 세속 오락물에서 경험했던 오페라 장르의 내용물을

 활용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된 수난곡은 1717년에 이르러서야 라이프치히에 등장했으며(유행에 민감한 신교회에서),

연로한 칸토르였던 요한 쿠나우는 1721년까지
오라토리오 수난곡을 토마스 교회에 소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흐 자신이 라이프치히로 오기(1723년) 바로 얼마 전이었다.
따라서, 바흐 수난곡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 중 하나는 초연 당시의 청중이 지금 우리들보다 훨씬 더 이 형식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 바흐의 위대한 작품 전부가 그렇듯이 - 우리들은 아마도 당시의 연주자들이나

심지어 바흐 자신보다도 마태, 요한 수난곡을 훨씬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바흐의 수난곡들은 성금요일에 연주되었으며 1부와 2부는 각각 통상적으로 연주했던 칸타타와 마니피카트를 대체했다.
수난곡은 칸타타와 마찬가지로 전례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리아와 아리오소를 이루는 자유시, 그리고 뼈대를 이루는
합창곡은 듣는 이들에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과 감정적인 이해 모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페라에서 아리아가 담당하는 역할,
즉 극중 세계 안에서 특정 배역을 전개시켜 가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수난곡은 춤곡이나 특히 오페라 같은 세속적인

고안물을 자유롭게 빌려왔기 때문이다.

자유시(라이프치히의 시인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키, 일명 ‘피칸더’가 썼다)와 바흐의 작곡 구성 모두에서 특히

충격적인 것은 대화 형식을 강조한 점으로,
그 결과 이중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수사학적인 고안 덕분에 대조적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감정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으며
(가령 ‘보라, 우리 구세주께서 잡혀가신다/그 분을 놓아드려라, 그분을 떠나라, 묶지 말아라’), 상호보완적인 관점을 펼치거나
(‘아, 우리 구세주께서 끌려 가셨네/그대 친구는 어디로 갔는가?)’ 혹은 한 명의 화자와 대중 사이의 대화(‘저 주님 옆에 깨어있습니다/그럼 우리 죄가 모두 잠들어 버릴 것입니다’)도
가능해진다. 이런 모든 고안은 한 명의 감상자 안에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의인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감상자의 반응과 갈등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 형식의 악곡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 합창곡인데, 앞으로 명상적인 악곡들이 다루게 될 주제의 상당 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나중에 나오는 많은 아리아를 시작하는 단어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합창곡은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시온의 딸(구약성서 아가에 나오는 알레고리적인 인물로서
예수의 수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로 재해석된다)’로 꾸며졌다. 솔로몬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그리스도교적인 맥락(context)에서 다정한 신랑인 예수와 그의 신부(新婦)인 교회로 재구성되었다. 그런 다음 아뉴스 데이에 붙인 독일 코랄인 ‘흠 없는 주님의 어린 양(O Lamm Gottes, unschuldig)’이 나오는데, 리피에노 소프라노들이 부르는 이 부분은 제3의 요소를 소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순결한 희생양으로 묘사되며, 이런 이미지는 어린 양인 그리스도, 모든 신자들의 (‘여성적인’) 공동체의 신랑이 새로운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세상의 종말을 가리키고 있다. 작품 전체를 볼 때, 바흐는 구약과 신약 성서 사이의 대화, 그리고 성서와 루터교 전통(전통적인 코랄) 사이의 대화,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동시대 신앙인 사이의 대화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끊임 없는 대화야말로 이 작품을 훗날의 시대적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부여한 것으로서, 듣는 이로 하여금 대화를 계속하도록 끌어들인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바흐는 당대의 백과사전적인 욕구를 공유했으며, 그 결과 사실상 당시 존재했던 모든 음악 양식을 하나로 엮었다.
마태 수난곡에는 레치타티보(아콤파냐토와 세코), 아리오소, 아리아(춤곡과 콘체르토 요소를 포함한다), 코랄, 코랄 환상곡,

합창과 모테트가 들어있다.
바흐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두 개의 요소(이중 앙상블과 그리스도 말씀에 부여한 ‘후광’ 효과)와 함께 이 모든 음악 양식들은 마태 수난곡을 무자비할 정도로 직접적인 요한 수난곡보다도 더 야심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에 담긴 여러 단계의 상징주의, 신학적인 해석, 그리고 - 그 중 가장 놀라운 - 심리적인 통찰력에 있어서 마태 수난곡은 아마도 그리스도교 주제를 다룬 모든 예술 작품 중 가장 깊이 있고 야심적인 작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흐가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르게는 1725년에 작곡을 시작한 것 같지만 성금요일 연주에 맞추어 작곡을 끝내거나 완성하지는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요한 수난곡을 다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바흐는 1727년까지 마태 수난곡을 연주하지 않았으며 1736년에 다시 작품에 손을 대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형식으로 수정했다.
그리고 대략 1742년 무렵에 연주했을 때 악보에 마지막 수정을 했는데, 필자의 음반은 최종 판본을 녹음한 첫 번째 음반이다.

 

Vocal Scoring

바흐의 성악 편성에 대한 논쟁은 벌써 사반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바흐가 대부분의 합창 작품을 성부 당 한 명(현존하는 연주보를 바탕으로 조슈아 리프킨이 처음으로 제안했다)으로 연주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또다시 자세하게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을 따른 성공적인 연주가 많이 있으며,

마태 수난곡 역시 최소한 한 개의 좋은 음반이 있다.

최소편성 이론에 대해서 여전히 많은 논쟁이 있긴 하지만, 특히나 마태 수난곡은 여덟 명의 主가수를 썼을 때
(즉 각 합창단에 네 명의 가수가 있다) 놀랄 만큼 효과적이다. 이렇게 연주할 경우 작품은 듣는 이를 실제 상황에서

벌어지는 대화로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를 탐구하게 된다. 여기에는 진정한 이중 합창단 구조로 씌어진 작품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다른 조합도 있는데,
가령 한 명의 가수와 네 명의 대조, 혹은 제1 합창단에 있는 가수 두 명이 나누는 대화가 진행되면서 이들이 제2 합창단에 있는 네 명의 가수들과 나누는 대규모 대화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몇몇 합창곡과 모든 코랄에서 여덟 명의 가수들이 모두 함께 노래할 때, 그 효과는 양쪽 합창단의 가수들이 이미 하나로 섞여버린 다른 연주와는 상당히 다르다. 또한 최소편성은 일반적으로 합창 연주보다는 독창 연주와 더 가까운 표현과 메시지 전달을 가능하게 만든다. 가수들이 하나로 뭉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무리를 노래할 때 우리는 단지 군중이 아니라 하나의 무리를 이룬 개개인을 듣게 되는 것이다.
최소 성악 편성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점은 작품이 진행되면서 네 명의 주역 가수들, 그리고 이보다 약간 덜하기는
하지만 제2 합창단의 가수 네 명이 우리에게 익숙해지는 방식이다. 가수들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현재 벌어지는 연주에서 여러 개의 배역을 맡는 것을 듣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실제적인 현실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이들 가수들은 수난 이야기에 대한 당대인의 반응을 나타내는 아리아를 여러 곡 노래하면서
과거를 현재로 불러옴과 동시에 관찰자인 우리의 반응을 공유한다. 이는 마치 여덟 명의 가수들이 중계해주는 연주를 통해

수난 이야기의 본질이 우리 시대에 실제로 펼쳐지는 것 같은 효과를 주며, 점점 더 이들 가수들이 저 멀리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게 속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수 역의 경우는 특별히 의미심장하다. 첫 합창곡에서는 제1테너가 상징적인 ‘시온의 딸들’ 중 하나를 노래하며 듣는 이를

라멘트로 초대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제3자의 입장에서) 레치타티보를 시작하면서 이야기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합창 안의 (일인칭 시점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에 살짝 발을 담근 다음 코랄과 아리아 (여기서 제1테너는 ‘예수 곁에 있을 것’을 약속하는데, 실제 연주에서도

제1테너는 물리적으로 예수역 가수 바로 옆에 위치한다)에서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렇듯 가수는 오페라 양식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면서 성서 속의 인물들을 현재로 불러오는 장면들을 통해서 현실감을 부여하며,
이 현실감은 간간이 일어나기 때문에 더욱 더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3인칭 시점의 복음서 낭독에 과거와 현재의 다른 여러 성부를 한데 엮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은 극장풍의 표현보다는

소리로 표현하는 소설처럼 들리게 만든다.
예수의 경우는 복음사가보다도 더 두드러지는데, 이 배역을 노래하는 제1베이스는 현재 시점에서는 인간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합창단 안에서는 예수의 친구이거나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서 제1베이스는 특별히 예수의 인성(人性)과 관련이 있는 두 개의 아리아를 부르는데, 첫 번째 아리아는 키레네의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부분(따라서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모방자가 된다)에 나오며 두 번째 아리아는 예수를 마음 안에 ‘안치하자는’ 소망을 나타내는 곡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흉내 내고 예수와 동화되는 것을 예시하는 데 있어서 줄곧 예수 그리스도 역을 맡아온 가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덟 명의 가수를 편성하는 것이 암시하고 있는 종류의 사실성이 일종의 반(反)극장적 표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바흐의 편성에서 그 나머지의 역사적 인물들을 제시하는 방식은 더욱 더 두드러진다. 이 배역들은 세 명의 추가된 가수들이 부르는데,

 이들은 - 바흐가 배치한 배역에 따르면 - 연주에서 다른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이들은 심지어 코랄도 부르지 않으며, 1부의 첫 번째와 마지막 합창곡에 ‘in ripieno’로 추가된 두 명의 소프라노는 그 외에는 어디서도
노래하지 않는 것 같다.  이들 세 명의 가수 중 최상성부 가수(소프라노)가 빌라도의 아내와 두 명의 하녀 역을 맡는다.
두 개의 베이스 배역 중에서 한 명이 유다와 첫 번째 사제 역을 맡으며, 다른 한 명은 베드로, 빌라도, 가야파, 두 번째 사제역을 맡는다.
따라서 연주가 흘러가면서 이들 가수들은 까마득히 먼 옛날에 팔레스타인 땅에 살았던 알 수 없는 사람들로 보이며,
그 결과 중요 배역들(특히 예수의 존재가 그런데,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다, 베드로, 빌라도보다 훨씬 더 생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의 확고한 존재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효과를 준다.

아무튼 이들 작은 배역들의 어려움이라든가 성악적으로 준비를 하기 힘든 여건을 생각하면, 바흐는 어쩌면 이들 가수들이 어색하고

서투른 소리를 내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설사 이것이 역사적으로 올바르다고 해도 이 연주에서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다.


Instrumental Scoring
대부분의 기존 연주(심지어 최소편성 연주들도 포함해서)보다 바흐의 성악 편성을 더 직접적으로 따르면서 우리는 바흐가

마태 수난곡을 마지막으로 연주했을 때 배치했던 기악 편성도 재현하기로 결정했다.

최종 판본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아마도 제2 오케스트라에 오르간 대신 하프시코드를 배치한 점일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흔히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가장자리에 있던 두 번째 주 오르간이 파손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연주자들과) 이 악기의 거리를 생각하면 두 번째 주 오르간을 콘티누오 용도로 쓴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보이며,

게다가 원하기만 했다면 바흐는 얼마든지 포지티브 오르간을 가져다 제2 합창단용으로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흐의 여러 후기 연주에서 하프시코드를 쓴 사실로 미루어볼 때, 하프시코드가 단순히 응급용 대용품이 아니라

 음악 구조상의 대조를 위해서 포함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바흐는 마지막 연주에서 제2 합창단에 비올라 다 감바를 덧붙였는데, 제1 합창단과는 다른 부분(그리고 아마도 다른 연주자)에 등장한다.
바로 제2 테너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나의 예수께서는 침묵을 지키시고/인내하라’)인데, 여기서 비올라 다 감바는 기존의 첼로와 비올로네(그리고 레치타티보에서는 오보에도)가 연주하는 콘티누오에 가세한다. 말하자면, 비올라 다 감바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악기의 대용품이 아니라 덧붙여진 것 같다.
그 결과 두 곡에 보다 신랄한 음색을 주는 효과가 있는데, 아마도 괴로움에 빠진 테너가 인내로 대항하려는 조롱을 더욱 선명하게

묘사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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