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음악 이론
2011.08.25 12:08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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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파

가톨릭 교회 성음악사적으로 볼 때 대그레고리오 교황이 로마 가톨릭 성가와 전례를 재정리하고 이를 다시 체계화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반면 새로 다듬어진 성가를 이탈리아 국내를 비롯해 북부 유럽에까지 널리 전파시키는데 있어 커다란 공헌을 끼친 이들은 성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었던 수사신부들이 처음이었고 그 후 서기 800년 성탄 자정 미사때 교황 레오네 3세(Papa Leone III)로부터 황제의 대관식과 로마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카를로만요(Carlo Magno: 재768-814)였다. 특히 카를로만요는 서기 789년 아퀴스그라나 공의회( Concilio di Aquisgrana)를 통해 그레고리오 성가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성가로 추대하고 그 보급에 힘쓰는 한편 그레고리오 성가를 잘 부를 수 있도록 전문 성가학교와 성가대원을 스스로 육성하기도 했다.

대그레고리오 교황이 재정리및 편찬을 했던 까닭으로 교황의 이름을 빌어 그레고리오 성가로 불리워졌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적인 전례성가가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어떻게 보급되었는지에 관한 확산과정을 주요 국가별로 나누어 알아보기로 한다.

(1) 이탈리아

그레고리오 성가가 재정리되기 시작하던 6세기 말까지 당시 이탈리아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전례성가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째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북부 이탈리아 지방에서는 동방교회 전례의식의 영향을 크게 받은바 있었던 암브로지오 성가(Canto Ambrogiano)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 시용되던 로마노 안티꼬(Romano Antico) 성가다. 그리고 세 번째가 베네벤따노 지방을중심으로 남부지방에서 널리 불리어지던 베네벤따노 성가(Canto Beneventano)인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 베네벤따노 성가를 깟시노 성가(Canto Cassinese)라고도 부른다. 그 까닭은 베네벤따노 지방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몬떼 깟시노(Monte Cassino)라는 마을이 있고 이 곳에는 베네딕토 성인이 직접 세운 세계 최초의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성인은 이곳에서 그 유명한 베네딕토회 규칙서를 제정했고 성무일도에서 미사전례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성음악 전례의 틀을 만들어 이를 실제 수도원 안팎에서 사용함으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 전례성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때문이다.

7세기 초, 그레고리오 성가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난 후에도 위의 두 전례성가 즉, 암브로지오 성가와 베네벤따노 성가는 12세기때까지 그레고리오 성가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확산및 보급의 초기과정에서 지역교회 주교들이 이제까지 교구에서 전통적으로 불리어 오던 전례성가들을 제쳐두고 한꺼번에 모두 수용한 것을 아니었다. 비록 로마가 모든 가톨릭 교회의 수장(caput et mater omnium eccclesiarum) 의 위치였다 할지라도 그레고리오 성가가 전례에 적합한 성가가 아닌 단순한 찬미가 정도였다면 보급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거룩한 전례정신을 기본바탕으로 태어난 그레고리오 성가는 전례의 일치를 통해 로마 가톨릭의 일치를 이루는데도 큰 역할을 해 낸 것이다.

이탈리아 국내적으로 로마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그레고리오 성가를 전례에 도입한 곳은 놀랍게도 로마에서 700여 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시칠리아 섬이었다. 그 곳에는 대그레고리오 교황이 로마의 첼리오 언덕위에 있던 부친의 대저택을 개조해 수도원으로 만들고 초대 수도원장으로 있던 시절에 수도원 건물을 짓고 창립한 바 있었던 베네딕토회 수도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이탈리아 국내는 물론이고 북 유럽에까지 보급하는데 큰 공헌을 끼친 베네딕토회 수사신부들의 활약상을 바로 그들이 소속되어 있었던 수도원의 초대 원장이 교황이었던 점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

시칠리아 섬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국내에 전파되기 시작한 그레고리오 성가는 한세기 후인 8세기때 부터는 알프스와 경계를 이루고 있던 북부지방에까지 골고루 확산되었다. 7세기초부터 8세기초까지 그레고리오 성가 보급에 있어 중심을 이루었던 지방을 소개하면 빨레르모, 깔라브리아, 소렌토, 베네벤따노, 바리, 로마, 수비야꼬, 노르치아, 뻬루지아, 아씨시, 스폴렛또, 피렌쩨, 리에띠, 뽐포사,몬자, 밀라노, 아뀔라, 만또바등이며 당시 그 지방에 있던 베네딕토회 수도원들이 그레고리오 성가 보급에 있어 견인차 역할을 해 내었고 지금도 이 지역에 있는 오래된 베네딕토회 수도원들의 고문서 보관소에는 그레고리오 성가 필사본(수사본:Manoscritto)들이 보관되어 있다.

(2) 영국

대그레고리오 교황(Papa Gregorio Magno)은 로마 가톨릭 전례와 성가의 재정비외에 가톨릭 전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교황은 서구 유럽을 대상으로 가톨릭 복음 전교계획을 세웠으며 그 첫 번째 대상국을 로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을 택했다. 영국을 서구 유럽 복음화 전교계획의 첫 대상국으로 선정한 교황은 자신이 초대 수도원장으로 있던 첼리오 언덕 위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Monastero Benedettino di S. Andrea sul Celio)의 후임 원장이었고 로마 가톨릭 전례와 성가를 재정비할 때 조력자로써 교황을 도운 성 아고스티노(S. Agostino)를 영국선교단의 책임자로 내정했다.

성 아고스티노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수사들을 중심으로 한 선교단을 구성하고 서기 596년 로마를 떠나 이듬 해 부활대축일 즈음해서 영국에 도착했다. 선교단이 로마를 떠날 때 교황은 이제 막 새로 펴낸 성가집과 전례에 관한 여러가지 서적들을 성 아고스티노에게 주면서 영국 거리를 행렬해서 다니되 반드시 열품도문(Litania/성인호칭기도)을 노래하도록 특별히 당부했다고 한다.

대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 성가집을 재정비 할 때 모든 성인들에게 전구를 빌며 기도하던 열품도문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교부론 제 36장과 77장을 참고하면 서기 590년 11월 로마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교황은 전염병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일념으로 로마시민들과 함께 행렬을 했고 이 때 부른 성가가 바로 모든 성인들의 호칭 기도였다고 한다. (로마, 성바오로 출판사 207-208쪽 에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영국에 도착한 선교단은 교황의 부탁대로 연일 거리를 행렬해 다니면서 열품도문을 노래했다. 한번은 당시 영국 왕이었던 에텔베르토(Etelberto)가 행차할 때 그 뒤에서 성 아고스티노를 비롯한 수사들이 행렬지어 따라가며 열품도문을 노래 부르자 왕은 그 노래소리에 감격했고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 후 영국 왕까지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선교단들의 전교활동은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고 영국전체가 급속도로 가톨릭화되기 시작했다.

영국 왕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한 성 아고스티노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보고하기위해 로렌죠 수사를 로마에 보냈다. 서기 601년 교황은 더 많은 성가집과 전례서들을 선교사들에게 주어 다시 영국으로 파견시켰으며 625년에는 영국 내에 두 곳의 교구가 처음으로 생겼다. 노턴브리아와 캔터베리 교구들이다.

대그레고리오 교황 이후에도 로마 교황청에서는 영국의 가톨릭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교황청에서는 깐또레(cantore: '노래하다"라는 뜻의 cantare(깐따레)에서 파생된 말로 교회 독창자를 뜻함)와 교육을 위한 전문가(maestro:마에스뜨로)들을 영국에 계속 파견했다. 켄터베리 교구에는 쟈꼬모(Giacomo)부제가, 켄트 교구를 위해서는 스테파노 애디(Stefano Aeddi)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켄트 교구의 윌프리도(Wilfrido)주교는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직접 그레고리오 성가를 배우고 익히기까지 했으며 교황에게 영국 교회를 위해 그레고리오 성가 전문대가를 파견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서기 680년 교황 아가또네(Agatone)는 영국 주교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최고의 대가(Arcicantore)였던 베네딕토회 수도원장 요한을 영국에 파견시켰다. 요한 수도원장이 영국에 파견되면서 영국교회내의 본격적인 그레고리오 성가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그레고리오 성가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설립을 위해 수도원을 창설했다.

요한 수도원장이 창설했던 수도원은 외어마우스(Wearmouth)교구내에 있었다. 그리고 수도원내에서 실시되었던 그레고리오 성가 교육의 명성은 삽시간에 영국 전체에 퍼졌고 많은 다른 수도원들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교육을 정식으로 받기위해 수도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요한 수도원장의 그레고리오 성가 교육방식은 완전한 로마식 그대로였으며 외어마우스 수도원은 그 후 오랫동안 영국교회내의 성음악 요람으로 자리잡게 되며 그레고리오 성가 보급을 통해 로마식 전례의 뿌리를 영국 전체에 깊이 내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이로써 영국은 자연스럽게 로마 가톨릭화를 이루게 되었다.

(3) 불란서(갈리아)

그레고리오 성가의 유럽 내륙지역 전파 과정에서 8세기 중엽부터 약 100여년 간 프랑코 왕국이 지배하던 갈리아(현재의 불란서와 벨기에, 북부 이탈리아 전체와 스위스, 독일, 네델란드의 일부까지를 포함한 대제국)는 성음악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서기 754년 1월 6일, 교황 스테파노 2세(Papa Stefano II)가 갈리아에 도착했다. 교황은 생드니(Saint Denis:성 디오니시오) 대성당에서 당시 갈리아의 실권자였던 피핀을 로마의 귀족(Patritius romanus)이라는 칭호와 함께 갈리아의 왕임을 공인해 주고 그의 두 아들인 Carlomagno(카를로마뇨/샤를르마뉴)와 Carlomanno(카를로만노/샤를르망)가 왕의 공식 후계자임을 인정해 주었는데 이때부터 로마와 갈리아간의 매우 밀접한 외교적 친분관계가 시작되었다.

로마와 갈리아의 동반자 시대가 구축되자 전례와 성음악 분야도 협력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갈리아에 그레고리오 성가 보급을 위해 로마에서부터 동행했던 성직자 몇 명을 남겨두었다. 당시 갈리아에는 갈리아 전례(Liturgia galicana)와 함께 갈리아 성가(Canto galicana)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나 로마전례와 그레고리오 성가가 유입되면서 갈리아 교회 전체에 로마식 전례와 성가의 사용 빈도수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교황 스테파노 2세의 후임이었던 바오로 1세 교황(Papa Paolo I)은 피핀에게 로마교황청에서 사용하고 있던 응답가 모음집인 안티포나 성가책(Antifonario)와 응송집(Responsoriale)을 보내는 한편 교황 전속 성가대의 제 2 독창자였고 그레고리오 성가 이론을 가르치던 시모네(Simone)를 루엔(Ruen)에 파견했다. 당시 루엔의 성주는 피핀의 형제인 레메디우스(Remedius)였다. 루엔에 도착한 시모네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실기와 이론을 가르치기 위한 음악학교를 설립했고 당시 이곳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배운 성끄로데간고(S. Crodegango)는 다시 메츠(Metz)에 성음악 학교를 창설했는데 그 후 이 성음악 학교는 중세기를 통틀어 불란서에서 가장 권위있는 그레고리오 성가학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로마 가톨릭 전례가 불란서뿐만 아니라 프랑코 왕국의 영향권안에 있던 다른 유럽국가 전체에 단기간 동안 크게 보급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해 낸이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연 까를로만요였다. 유럽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까를로만요는 단순한 정복자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문화예술을 적극 장려하는 한편 그의 타고 난 종교적 심성때문에 그레고리오 성가에 매우 수월히 심취될 수 있었고 로마에서 파견된 깐또레들에게 그레고리오 성가를 직접 배우기도 했으며 왕 스스로가 그레고리오 성가를 즐겨 노래했다. 또한 시편창법의 이론과 실기까지 배워 성무일도를 바칠때 시편은 반드시 노래로 불렀다고 한다.

학자들간에는 유럽의 중세사를 논할 때 까를로만요가 로마 교황청의 수호자로서 넓은 유럽을 통치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앞 세웠고 전례를 로마식으로 통일시킴으로서 보다 통치를 수월히 하려했다고 까를로만요의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책략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럽사가 아닌 순수한 성음악사 관점에서 보면 조금 다른 양상이 보인다. 두케스네(Duchesne)는 자신이 쓴 <Historiae Francorum:프랑크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까를로만요는 불란서 또는 독일인들이 부르는 성가를 매우 싫어 했는데 그 까닭은 거칠고 무거운 소리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 아드리아노 1세(Papa Adriano I)가 로마에서 파견한 두 명의 깐또레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까를로만요는 불란서와 독일인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성가 자체가 주는 유연하고 매끄러운 선율적 진행과 이탈리아인들 특유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까를로만요로 하여금 로마의 그레고리오 성가에 심취토록 했고 로마 가톨릭에 대한 공경심이 더욱 두터워졌다."

여기서 잠깐 까를로만요의 로마 교황에 대한 순종심이 어떠했는지를 소개한다. 아드리아노 1세의 교황일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서기 772년 성주간 기간동안 로마를 방문했던 까를로만요의 행적에 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로마의 고위 성직자들과 정치 지도자 그리고 귀족들은 까를로만요를 환영하기 위해 성 밖까지 나갔다. 까를로만요는 그들과 만나자 말에서 내려와 환영을 나온 이들과 함께 행렬지어 교황청으로 들어왔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가까와지자 까를로만요는 다시 왕의 화려한 의복을 벗고 당시 순례자들이 입던 거친 베옷으로 갈아 입었다. 이윽고 교황을 대면하게 된 까를로만요는 교황좌가 놓여 있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 갔는데 계단마다 입맞춤을 하며 올라 갔다. 성가대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찬미받으소서'라고 성가를 장엄하게 불렀으며 까를로만요는 계단 위 교황좌에에 촥좌하고 있던 교황의 손에 입맞춤하는 것으로 성주간 목요일 최후의 만찬 미사가 시작되었다"

유럽의 절대 권력자였던 까를로만요가 교황과의 만남을 위해 말에서 내려와 걸어 갔고 화려한 왕의 의복대신 순례자들이 걸치는 거친 베옷으로 갈아입고 교황좌가 놓여 있던 계단을 입맞춤하면 무릎으로 기어 올라 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교황권에 대한 그의 순종심이 얼마나 대단했었는가를 알 수 있다.

두케스네의 학설에 미루어 본다면 까를로만요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갈리아 성가보다 더욱 크게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례시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부득이 로마전례의 선택이 최상의 방법이었고 이를 다시 프랑코 왕국 전체에 원할히 보급하기 위해서 로마 교황권의 강화가 필요하였는데 결과론적이지만 그레고리오 성가가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을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가지 요인들 중 적어도 한 부분은 차지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까를로만요는 대통치자로서의 자신의 권한을 그레고리오 성가 보급과 로마전례의 통일을 위해 매우 유효하게 행사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지역의 교회와 수도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의무적으로 부르도록 명령했는데 왕의 권위를 이용해 무조건 억압적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로마전례를 의무화하는 과정에서 그 당위성과 필요성을 지역교회 주교들이나 수도회 장상들의 이해를 구하고 전통적인 갈리아 전례와 성가를 대신해 그 자리에 로마의 전례와 성가가 들어선다는 불만요인을 희석시키기 위해 수 차례의 관구 공의회(Concilio provinciale)를 소집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서기 789년 까를로만요는 아퀴스그라나 공의회에서 불란서 교회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 로마식 전례와 그레고리오 성가만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했으며 이때부터 갈리아 전례와 성가는 불란서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반면 영국에 이어 불란서도 그레고리오 성가가 교회의 공식성가로 인정받는 등 그레고리오 성가의 유럽 확산 과정에 결정적인 크게 보급되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4) 스페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유럽전파 과정에서 영국은 6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불란서는 8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비교적 쉽게 보급이 되었던 반면 스페인은 훨씬 뒤인 11세기 중반 이후에 가서 로마전례가 공식화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도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 지도를 펴고 살펴 보면 스페인 지형을 이루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의 고산지대가 유럽과의 교통을 차단하고 있다. 피레네 산맥이 없었다면 스페인 역시 까를로만요의 군대에게 쉽게 정복이 되었을 터이고 따라서 로마전례와 그레고리오 성가도 불란서와 거의 동시기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험난한 지형적인 자연조건때문에 스페인은 까를로만요의 유럽 정복의 세력구축으로부터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 이전부터 반달족, 고트족, 비스고트족등 많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게되었고 그때마다 그리스도교 문화와는 전혀 다른 외래문화와 종교가 함께 들어와 스페인 국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P. David같은 학자는 자신의 저서인 <Etudes historique sur la Galice et le Portugal du V au XII siecle(5세기부터 12세기 사이의 갈리아와 포루투칼의 역사)>에서 "비그리스도교적인 문화가 스페인 내륙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확산될수록 스페인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모자라비코 전례와 성가(Canto Mozarabico)에 대한 스페인 교회와 수도원의 보호책은 더욱 깊고 공고해져 갔으며 외래문화에 대한 배척감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서기 1063년 아라고나에서 개최되었던 야카 공의회(Conciulio di Jacca)에서 스페인의 모자라비코 전례를 대신해 로마전례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자는 결정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5세기 전인 서기 538년 당시 브라가(Braga)교구의 교구장 쁘로후뚜루스(Profiturus) 주교는 교황 실베리오(Papa Solverio)에게 보낸 서한에서 로마의 전례와 성가를 자신의 교구내에서 올바로 사용하기 위한 규범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561년 브라가 공의회에서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쁘로후뚜루스 주교에게 보낸 로마 전례와 성가에 관한 규범에 따라 성청과 전례를 일치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서기 589년 제 3차 톨레도 공의회(III Concilio di Toledo)에서는 스페인의 고유한 전례와 새로 로마에서 유입된 전례와의 공통부분을 찾아 스페인 교회에 적용해야 한다는 결의를 했고 이어 개최된 제 4차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시빌리아의 성이시도로(S. Isidoro di Siviglia)의 스페인 전체 교회의 통일된 모습의 전례는 고유한 전통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결국 로마전례와 성가는 더 이상 스페인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로마 교황청과 일치를 통한 그리스도인들의 대단합을 목적으로 로마의 전례와 그레고리오 성가를 스페인 교회의 공식 전레와 성가로 공인한 야카 공의회 이후 그레고리오 성가는 스페인 전체에 단 기간내에 급격히 보급되어 갔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Papa Gregorio VII)는 스페인 교회 주교들과 왕족들에게 로마 전례와 성가를 사용하고 부름으로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는 교황친서를 보내 전례와 성가의 일치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단합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 왕 알퐁소 6세는 교황의 원의를 수용하고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오 성가를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했으며 모자라비꼬 전례와 성가를 더 이상 스페인에서 사용치 못하도록 하는 왕의 칙령을 반포했다.

11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 교회가 로마 교황청과 전례를 일치시킴으로서 로마전례의 공식성가였던 그레고리오 성가는 이제 비로소 유럽전체에 그 사용범위가 더욱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유럽 전역에 걸친 확산과 보급은 단순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성가라는 의미를 초월해 유럽문화예술 발전의 기틀이 되는 동기부여를 했다는 점에서 서양 음악사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서양음악의 시작으로까지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PL XVI, 462-464; G. MORIN, <Revue Benedictine>, 1904
E. CATTANEO, Sul canto ambrosiano, 1952
E. MONETA - CAGLIO, Canto Ambrosiano
A. GASTOUE, Le chant gallican, 1939
H.ANGLES, La musica medieval de Toledo hasta el siglo XI, 1939
L. DUCHESNE, Liber Pontificalis, 1955
PL LXXI, coll/684, 688-689, Chronicum continuatum
PH. JAFFE, Monumenta Carolina,
MGH(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Capitulare n.70
P. DAVID, Etudes historique sur la Galice et le Portugal du V au XII siecle, 1947
J.HEFELE - H. LECLERCO, Histoire des Conciles, 1907-1921
A.P. ERNETTI, Sroria del canto gregoriano,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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