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레고리오 성가의 역사적 관찰
1) 그레고리오 성가가 태어나게 된 배경
그레고리오 성가가 가톨릭 교회 전례음악으로 아직 그 기틀을 마련하기 전인 5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반도는 이민족들의 빈번한 침입과 약탈로 점철되던 시기였다. 나라 전체가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니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정도 그리 편안하지는 않았다. 교회 전례면에서 보더라도 로마식 전례가 지금처럼 통일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밀라노는 밀라노 전례, 남부 지방에서는 베네벤또와 몬테 카시노를 중심으로한 베네벤따노 전례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국경선 넘어로 지금의 불란서 남부 지방에 해당되는 갈리아 지역에서는 갈리아 전례, 스페인 쪽에서는 모자라비꼬 전례등등 나라와 지방마다 같은 로마 가톨릭 교회(Chiesa Cattolica Romana)이면서 미사전례 양식과 전례음악은 서로 달랐다.
당시 교회전례의 원천은 수도원 중심이었다. 베네딕토 성인이 창립한 베네딕토 수도원은 로마 교황청으로 부터 관할구역의 자치권을 인정받았던 관계로 교구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전례음악의 경우 수도원에서 이끌어 나갔다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정도다. 따라서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미사와 성무일도중 부르던 미사곡과 시편송, 응송, 찬미가 등이 교구의 미사전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전통때문에 지금도 그레고리오 성가가 옛 모습대로 불려지고 있는 곳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전역에 흩어져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로마식 전례와 전례음악의 뿌리에 관한 연구에 필수적인 수사본(Manoscritto)들의 대부분 역시 베네딕토 수도원에 가야 찾아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전례시 사용되었던 성가를 전례음악 내지는 전례성음악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러면 그리스도교가 처음 로마제국으로 유입된 1세기 중반부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불렀던 모든 성가를 통칭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아니다. 그레고리오 성가 이전에 신자들 사이에 널리 불려졌던 성가들을 다른 이름으로 분류된다. 인노(Inno. 라틴어로는 hymnus. 찬미가), 로마노 안티꼬, 암브로지오 성가, 베네벤따노 성가등인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시간에 다시 기술하겠다
원래 로마인들은 외국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고 또한 외래문화를 흡수해서 로마화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박해시대였음에도 종교적 모임을 가졌고 그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기도와 성가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성가는 시나고가에서 유태인들이 부르던 시편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그리스 고대 선법을 사용한 찬미가도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불렀던 성가를 로마노 안티꼬라고 이미 밝힌바 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로부터 최초의 공식 인정을 받고 그 후 국교로까지 승격되고 난 후, 이제 땅 밑의 지하교회라는 처지에서 땅 위로 당당히 올라오게 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미사전례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이제는 소리 높여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를 수 있었던 그 모습은 상상이 간다.
로마를 중심으로 로마식 전례와 성가,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암브로지오 전례와 성가, 남부에서는 베네벤또와 몬테 카시노(베네딕토 수도원 모원이 있는 곳)를 중심으로 베네벤따노 전례와 성가가 발전되는 한편, 로마의 신자들 사이에는 암브로지오 성가, 베네벤따노 성가를 비롯해 멀리는 비잔틴과 갈리아와 모자라비꼬 성가들까지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불리워 졌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전례와 성가를 정리하기 이전, 벌써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는 미사전례 중 Introito(입당송), Kyrie(자비송), Gloria(대영광송), Graduale(화답송), Alleluia(알렐루야), Tractus(연송), Offertorio(봉헌송), Praefatio(감사송), Sanctus(하느님의 어린 양), Pater noster(주님의 기도), Communio(영성체 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음악들중 입당송, 봉헌송, 자비송, 연송에는 동방교회 전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까닭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시의 내용을 담은 긴 가사가 매 절마다 끼어 있었다. 이러한 것을 Tropo(뜨로뽀)라고 하는데 , 이는 문학적 용어로써 "은유 또는 비유"라는 뜻이며 "p"자가 하나 덧붙여지어 Troppo라는 단어가 생성되기도 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어에서 "많다, 지나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황이 되기 전 베네딕토 수도원의 원장(Abate)을 지냈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교황청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교황의 전기(La vita di S. Gregorio Magno, Giovanni Diacono 저술)에는 교황이 대사의 자격으로 임지에서 많은 공적 예절에 참여하기 위해 로마식 전례와는 다른 동방전례를 익히기 위해 매우 힘들어 했다고 한다. 비잔틴 전례가 지나칠 정도로 화려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교황의 이러한 경험은 후일 로마 가톨릭 교회 전례음악을 정리하는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고 전례음악 연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Les origines, A. Gastone)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 밑에서 나라 또는 지방에 따라 미사전례와 전례음악이 서로 다름으로써 빚어지는 혼선을 막기 위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성좌에 촥좌한 후, 바로 시작한 작업이 전례와 함께 전례음악의 재정리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통일 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다. 교황이 전례음악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우선 가사가 성서에서 바로 비롯되지 않은 성가들은 제외시켰다. 성시를 가사로 한 인노(Inno)가 그러한 이유때문에 교황에게 거부당했던 것이다.
"전례음악(Musica Liturgia)"를 음악학(Musicologia)적인 측면에서 저술한 발렌띠노 도넬리아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 전례를 로마식 중심으로 통일 시킨 이유들을 첫 째, 전례음악에 사용되고 있는 가사와 멜로디의 통일화 작업이 교황의 원의(desiderio del papato)였으며, 두 번째는 로마의 전통을 지역교회에 따르게 함으로써 교황권의 권위(autorita' pontificia)를 세우려고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두 번째 이유가 더 크다고 한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로마 가톨릭 교회음악의 첫 창시가 아니었다는 학자들의 주장에 본인도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전술한바와 같이 그레고리오 성가 이전에 이미 가톨릭 교회 미사전례와 또는 수도원들의 성무일도에서 오늘날과 거의 같은 내용의 미사곡을 비롯한 전례성가들을 불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이미 기존 해 있던 미사전례곡들과 성무일도에 사용되던 시편송이나 응송, 찬미가들을 전례력에 맞추어 다시 정리한 업적은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교황의 노력이 없었던들 가톨릭 교회 전례음악이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으로 천 년을 넘는 긴 수명을 연장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