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레고리오 성가의 역사적 관찰
2) 대 그레고리오 교황(Papa Gregorio Magno)은 누구인가?
대 그레고리오 교황(540-604)은 부친 Gordiano(고르디아노)와 모친 Silvia(실비아) 사에에서 서기 540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당시 로마의 귀족이었던 상원의원을 지냈을 정도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 귀족가문이었다. 교황 펠리체 3세(Felice III: 재위483-492)는 그의 고조부이기도 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에 로마를 비롯해 이탈리아는 유난히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았다. 그가 여 섯살 되던 546년, 또틸라(오스트로고티 족의 왕)의 로마침입을 시작으로 568년에는 다시 북부 유럽 야만족들이 연합해서 롱고바르드 족을 앞 세워 이탈리아를 침략했으며, 581년에는 성 베네딕토(480-547)가 몬테카시노에 직접 세운 세계 최초의 대수도원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파괴를 입기도 했다. 청년 그레고리오는 이민족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교황을 도와 싸움터에 나갔다. 그는 이교도들로부터 가톨릭의 성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해 싸웠다.
이민족, 이교도들의 끊임 없는 로마 침략으로 부산했던 시기에도 그레고리오는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배운 학문은 수사학, 문법학 그리고 교회법이었는데 자연과학 분야도 큰 관심을 가지고 천문과 지리학을 공부했으며 성 암브로지오와 성 아고스티노가 남긴 저서들도 열심히 탐독했다. 당시 그레고리오의 스승들은 라베오네, 울삐아노, 에르모제네로써 당대의 석학들이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온 다는 말이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맥인 것 같다.
그가 쌓은 학문적 지식과 교황청을 도와 이교도들과 대항하기 위해 싸움터에 자원해서 나갈 정도로 교황에 대한 불같이 뜨거운 충성심의 소유자인 청년 그레고리오는 천성적으로 겸손한 성품이었으나 교황의 눈에 어찌 띄지 않았겠는가?
서기 573년 그레고리오가 33세 되던 해이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청으로부터 로마의 감독관(Praefectus urbis)으로 임명 받는다. 지금의 로마시 검찰총장쯤 되는 높은 직책이다. 그러나 그레고리오는 미래의 출세가 보장된 이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다. 로마의 감독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못 가, 그레고리오는 그 자리를 스스로 내어 던지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입회하여 수도자의 길로 인생의 향로를 결정했다. 당시 로마 근교에는 성 베네딕토가 영성수련을 쌓았던 수비야꼬(Subiaco)가 있었고 수도회의 창립자였던 성인의 명성은 이미 로마에도 크게 나 있었다. 잠시 우리나라에서는 성 분도회라고 일컫는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창립과정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한다. 성 베네딕토회와 그레고리오 교황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비야꼬는 그레고리오 바로 전 세대였던 성 베네딕토가 문학공부를 하기 위해 고향인 노르치아(Norcia)를 떠나 로마에 왔다가 당시 어지러운 세태를 목격하고 수도자의 길을 결심한 후 처음으로 영성수련을 쌓기 위해서 찾아 갔던 곳이다. 성 베네딕토는 수비야꼬에서 3년 간 은수자로써 수련을 쌓은 후(수련기간 중 로마노 성인과의 일화는 유명) 그의 이름을 소문으로 듣고 각처에서 찾아 온 수도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 공동체가 서양에서 최초로 시작된 수도회 공동체이다. 성 베네딕토는 그 후 수비야꼬를 떠나 몬테 카시노로 수도원을 옮긴 다음 그 곳에서 유명한 베네딕토회 규칙서를 만들고 본격적인 수도원 공동체를 꾸려 나간다. 그러나 수비야꼬에서 창립한 첫 수도원은 베네딕토회의 모원의 위치로써 그대로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많은 분원들이 생겨났다. 지금은 수비야꼬의 모원만 그대로 남아 있고 주변의 나머지 수도원들은 그 흔적만 남기고 있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버리고 성 베네딕토회에 입회한 그레고리오는 고행의 수련과 침묵의 영성을 통해 평생 하느님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다. 세상과 인연을 끊기 위해 그레고리오는 자신에게 상속된 가문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시칠리아 섬에 모두 여 섯곳의 수도원을 짓고 부친이 살았던 대저택을 개조하여 수도원과 성당으로 만들고 이를 성 안드레아에게 봉헌했다. 지금도 로마의 첼리오 언덕에는 성 안드레아 성당이 남아있다.
수도원 안에서 그레고리오는 스스로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고행을 자청했다. 수도자로써의 덕을 쌓는 한편 그레고리오는 베네딕토 2세 교황의 부제가 되어 교황청의 재산관리도 했다. 그리고 뻴라지오 교황 재위시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황대사로 임명 받았는데 이 때가 서기 580년 이었다.
6년 간의 교황대사를 마치고 그레고리오는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뻴라지오 교황이 선종하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성좌에 착좌했는데 그 날이 서기 590년 9월 3일 이었다. 수도자 그레고리오는 교황좌에 오르기를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 로마에서 종적을 감추었으나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기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교황좌에 오르는 것을 수락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였다. 그레고리오가 교황좌에 오르던 590년은 야만족들의 로마침입과 페스트까지 창궐해 매우 어렵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교황의 탁월한 능력으로 야만족의 침략으로 부터 성도 로마를 수호했고 페스트에 시달리던 로마인들을 위해 교황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구호의 일까지 서슴없이 해 내었다. 후일 사가들은 교황의 이러한 모습을 두고 교황이라기 보다는 수도자의 모습이었다고 기록을 남겼다.
모두 13년 7개월 간 사도좌에 있으면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가톨릭을 전교하기 위해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을 영국에 파견시켰으며 당시 나라와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르던 전례를 로마식으로 통일시키는 한편 각 처에서 불리워 지던 성가들을 재 정리하여 전례와 전례력에 알맞게 맞추었다. 이를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Antiphonale Missarum"이라는 제목을 붙여 편찬했고 최초의 그레고리오 성가집이었다. 교황은 영국에 선교사로써 수도자들을 파견시킬 때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지참토록 했고 수도자들이 거리를 다닐 때 성가를 부르도록 특별한 지시를 했다고 한다.
부유한 명문 가문에서 태어 나 장래를 약속 받을 수 있는 학문을 쌓고 로마의 감독관이라는 관직을 보직 받음으로써 출세가도가 보장되었으나 하느님의 보다 충실한 종이 되기 위해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던 그레고리오는 결국 하느님의 종중의 종인 교황이 되어 로마 가톨릭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65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는데 그 때가 서기 604년 3월 12일 이었다.
참고문헌: I. DIACONUS, Vita S. Gregorii, lib., II
A. GASTOUE, Les origines chant gregorien
G.MORIN, Les veritables origines du chant gregor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