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04 15:44

우당 이회영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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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백사 이항복의 11대 후손인 우당 이회영(1867~1932)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2월 혹한에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재 시가로 따지면 6백억원에 이르는 3만섬의 재산을 처분하고나서였다.





국내에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이역땅에서 펼친 우당 일가의 치열한 독립운동 뒤엔 아나키스트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지도층으로서의 명예와 책무를 위해 재산은 물론 형제들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던 처절한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역사상 전례가 드문 우당 일가의 숭고한 독립투쟁은 지배층이 그에 걸맞은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외면하는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6형제 중 5형제가 순국



우당의 6형제 중 5형제가 사실상 중국에서 순국했다. 이회영은 마흔네살이던 1910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20년이 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마련한 자금이 떨어지고 난 뒤 22년 독립운동의 세월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91)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1932년 11월 이회영은 무등(武藤)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유격대 결성 등을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대련(大連) 수상 경찰에 붙잡혀 고문치사 당하고 만다. 환갑이 훨씬 지난 예순여섯의 나이였다.





이회영의 형제, 그들의 자제 대부분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중 많은 수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6형제 중 첫째 이건영(1853~1940)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학교 졸업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뒤 귀국, 국군 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생활비와 경학사·신흥학교 창설 운영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상해에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한 셋째 이철영(1863~1925)도 병사했다. 넷째인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했다. 셋째 아들 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광복 뒤 석방됐다.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1933)은 1933년 소식이 끊겼다. 이호영의 아들 이규황(1912~1933), 이규준(1914~1933)도 함께 실종됐다.





6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1869~1953)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뒤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



아나키스트로서의 이회영은 덜 알려진 편이다. 2000년대 들어서야 그의 사상적 측면이 조금씩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회영은 만주 독립운동 시절 우리 민족의 사회 건설 방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민족간에 민족자결의 원칙 수립 ▲독립한 민족 내부에서 자유 평등 원칙 실현 ▲독립 후 지방 분권적 지방자치제 확립·지방자치제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 구조 구성 ▲일체 재산의 사회화 및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 ▲교육의 사회적 공영화 등을 주장했다.





이회영은 일제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를 배격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와도 분명한 사상적 선을 그었으며 권력다툼의 모습을 보이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회영은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추구했다”며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주의’가 아닌 억압당한 자로서 독재에 저항하고 되찾고자 하는 의미의 민족주의였으며 독립후에는 민족간에 호혜평등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해방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대, 그것도 이름있는 양반가 출신인 이회영이 자유와 평등,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경이”이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 체제의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현 시점에 자유 평등에 기초한 그의 이상과 신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말했다.



 

 

 

 

막내 규동씨가 전한 ‘고난의 가족사’



우당 이회영의 막내아들 규동씨(78)가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여섯살 때인 1932년 11월28일이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련에서 고문으로 사망해 화장된 뒤 한 줌의 재로 고국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지난 3월2일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만난 규동씨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며 “돌이켜 보니 참 기구한 인생”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규동씨는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 어머니(이은숙·1979년 작고)는 자금조달책으로 국내에 계셨다”며 “하지만 일제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조차 힘겨웠다”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 이씨는 바느질삯, 식모일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며 모은 돈 대부분을 만주로 송금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규동씨를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규동씨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지였으며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의 순국 뒤에도 비참한 가족사는 이어졌다. 1935년 규동씨의 형 규창씨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국내로 압송됐다. 규동씨는 “어머니는 형 옥바라지를 하느라 국내에 남았고, 나는 만주로 떠나 누님들과 함께 지냈다”며 “그때의 어려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규동씨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가족 모두가 해방 이후에 갖은 고초와 가문이 완전히 와해되는 비극을 겪었다”면서 “사촌 형제 대부분이 근근이 사는 형편으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그다지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6형제의 당시 선택을 원망한 적은 없었느냐’는 우문에 “윗대의 큰 결정은 여전히 내게 큰 자랑이며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항상 우러러 보며 살았다”고 답했다.





규동씨의 큰 아들은 현역 국회의원인 종걸씨다. 규동씨는 “내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도 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항상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해 규동씨는 “친일파 후손들이 땅을 찾겠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거꾸로 가는 역사가 안타까웠다”며 “누가 누구를 복수하는 문제가 아니며 과거 일의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내야 하는 차원에서 과거사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http://cafe.daum.net/trutharoundSeoul/Rhux/611?docid=1FQq6|Rhux|611|20090302094539&q=%C0%CC%C8%B8%BF%B5%20%BC%B1%BB%FD&srchid=CCB1FQq6|Rhux|611|20090302094539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방송일시 : 2009년 3월 1일 (일) 밤 11시 10분 (60분간)



■ 기획의도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 일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일제는 고위 지도층을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은사금과 귀족 작위를 제시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준 은사금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액.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협력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 명문가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 그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 이래 영의정만 9명을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부친은 이조판서, 당숙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생 이시영은 평안남도 관찰사와 한성재판소장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들은 한일합방이 되자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전 가족이 망명의 길을 떠났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정예의 독립군을 배양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이회영의 아내가 기록한 한 가문의 처절한 독립운동사
이회영 일가가 도착한 곳은 중국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 그들은 조선에서 가져간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척박한 만주 땅을 개간하고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의열단거사, 조선의용대, 대한광복군 등 일제 36년간 끊임없이 이어온 항일전쟁은 거의 모두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000여 명의 독립군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이자 독립의 설계자였던 우당 이회영은 좌우의 이념대립을 거치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와 함께 망명의 길을 걸었던 아내 이은숙의 회고록이 아니었다면 그가 걸어온 독립운동의 발자취는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한지 200장에 빼곡히 써내려간 아내의 기록에는 100년 전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국난의 위기에서 사회 지도층의 책임은 과연 무엇인지 우당 이회영 일가가 남긴 교훈을 통해 다시금 되돌아보고자 한다.

■ 주요내용

헤이그 특사 사건, 그 배후는 따로 있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이회영과 동지들은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한다. 이회영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고종에게 제안하고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대표로 보낸다. 일제의 감시를 뚫고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아 세계 각국의 대표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일생일대의 거사. 그 배후에 이회영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독립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일제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조선은 일본에 병합된다. 나라의 주권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회영과 형제들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난다. 서간도에 정착한 이회영 일가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3000여 명의 정예 교관들을 양성한다. 이들 졸업생들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국 전역을 누비며 독립전쟁을 수행한다.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마저 바쳤던 이회영. 서간도에서는 지금도 그를 독립운동의 수령이라 부른다.

실패로 돌아간 비밀 거사, 고종 망명 계획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뒤 국내로 잠입한 이회영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 거사를 기획한다. 그것은 바로 고종 망명 계획이었다. 한일합방의 최종인가자인 고종 황제를 해외로 빼돌려 합방의 부당성과 강제성을 증명한다면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독립운동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것이라는 의도였다. 이회영은 고종의 조카딸과 결혼한 아들의 신부례를 빌미삼아 궁궐을 드나들며 고종과 은밀히 내통한다. 고종의 외척 민영달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아 북경에 행궁까지 마련하지만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독립의 유일한 방안은 오직 무장투쟁뿐이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한창일 때, 이회영은 임시의정원 자리를 박차고 북경으로 돌아온다. 권력의 유혹에 빠지기보다 독립운동의 힘을 규합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민중의 무력에 의한 투쟁만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고, 의열단을 후원하며 일본군 핵심 간부나 식민지 수탈기관 등을 겨냥한 직접투쟁을 독려했다.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과 함께 ‘북경의 삼걸’로 꼽힌 이회영. 그는 당시 수많은 애국 청년들의 모범이자 사표(師表)였다.



 

한선교가 목조르는 이종걸 의원에 대해...

 

 

이종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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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걸 (李鍾杰, 1957년 5월 22일 - )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경기도 안양시 만안의 16대, 17대, 18대 국회의원이며 소속 정당은 민주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회영[1]의 손자이다. 민변의 인권변호사 출신 정치인으로 공정거래, 민사, 세무 법안 및 여성과 인권 그리고 IT 정보통신[2], 문화 체육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다.



 


[편집] 주요 이력
민변기획간사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회에서 뽑은 올해의 여성운동상[3] 을 수상
노무현 대통령후보 비서실차장 및 수행실장

[편집] 기타 이력
1976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 합격
1989년 서울대학교 졸업
1991년 변호사 개업
1994년 한국성폭력상담소이사
1998년 안양지역시민연대 공동대표
2000년 4월, 제16대 안양만안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2004년 5월, 열린우리당 원내 수석부대표
2004년 5월, 대한농구협회 회장(현)
2008년 4월, 제18대 국회의원 (민주당)
2008년 8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현)
2008년 12월,민주연대 공동대표 (민주당)

[편집] 생애

 

[편집] 어린시절
1957년 5월 22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신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4]의 손자로 태어나 안양 만안지역에서 자랐다. 중학과정으로 예원학교 피아노과를 졸업[5]했으나 진로를 변경하여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유신체제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이 때부터 '귀있는 자 들어라'라는 유인물을 뿌리는 일에 가담하는 등 정의를 추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편집] 청년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진학 이후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조부께서 고등경찰계의 감시를 받았던 것처럼 종로 경찰서 형사의 주요 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학변자로 입대하여 육군 병장 만기제대를 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편집] 사회활동 및 입법활동

 

[편집] 인권변호사
변호사 운동을 준비하여 연수원을 마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6]에서 인권변호사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이와함께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위원,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 등의 활동을 하면서 국가적, 대국가적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열정을 쏟았다. 또한 우리 나라 대표적인 인권운동가 박원순변호사와 '참여연대' 설립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편집] 변론인
매일경제신문사 부설 '머니라인'의 운영위원으로 금융의 흐름에 대한 법률자문을 하고 있으며, 현대, 대우, 삼성 등의 기업실무에 대한 법률자문을 하였다. 노동분야에서는 건설회사와 전자통신 분야 노동조합의 법률자문을 역임하여 노동법률문제에 에 도움을 주어 해고무효확인소송, 임금소송 등 노동관계 소송을 수행하였다. 또한 7년 이상 한국소비자보호원의 소비자법 소비자 인권에 관한 자문변호사로 활동하였다.

 

[편집] 여성운동
사회적 약자의 권리에 관심을 가져왔던 그는 특히 여성의 권리신장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1999년 여성신문사 선정 '여성인권에 가장 기여한 남성 10인'에 선정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올려진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사건을 담당하여 승소하였다.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의 초안을 마련하고 입법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여성단체연합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여성인권 디딤돌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08년에는 여성신문사 선정 '양성평등 남성리더 100인'[7]에 선정되었다.

 

[편집] 정치활동
현재 안양시 만안구 국회의원으로 3선(16-18대)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의 안양 시민으로서의 활동은 김영삼 대통령 정부 당시 노동악법 및 개악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시도할 때 안양에서 서명운동을 주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와함께 안양의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인' 안양지역시민연대'에서 공동대표를 맡았었다. 그리고 변호사활동을 통해 배운 소비자의 인권, 소상공인과 노동자 농민의 권리, 여성 청소년인권보장을 위해 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임기의 대부분을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IPTV, DMB 등 새로운 정보통신서비스의 정책적 지원, 기간 통신의 국적성 보장, 스팸메일 규제 정책, 전자상거래와 소비자 보호, 공인인증서의 보급, 정보통신요금의 합리적 재조정 등에 역점을 두고, 성과를 올렸다.[8][9] 또한 그는 대한농구협회회장이면서 세계농구협회 아시아연맹 부회장으로 08년 7월독도에 농구대를 기증[10]하기도 했다. 독립기념관 이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이사, 역사문제연구소 감사 등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다. 정치부 기자가 선정한 '백봉신사상'[11], 정보통신부장관 공로패[12] 등을 수상하였다.

 

[편집] 비판
2008년 10월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이명박대통령이 경제는 살리겠다는 대선공약이 대국민사기극이었다는 발언을 통해 정부의 경제실정과 낙하산인사에 대해 비판하는과정에서 문화관광부 장관 유인촌 등에게 졸개 등의 비하 용어를 썼다가 막말, 욕설 파문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3][14] 27일 한나라당으로부터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를 당했고,[15][16][17] 이에 대해 이종걸의원은 일부표현이 거칠었지만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17]

 


2008년 12월 최규성,이종걸,최규식 의원을 공동대표로 민주당 야당 내 야당을 표방하는 민주연대[18]가 발촉되었다. 이종걸의원은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제1야당인 민주당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며 나아가 외면받고 있다[19]고 민주당 지도부에게 반성과 쇄신을 정면으로 촉구했다. 2009예산안이 한나라당이 주도한 부자감세안이이라며, 졸속처리 되었으며 이에대한 민주당의 저지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20] 이에 무조건적인 비판으로 새로운 강경투쟁일 뿐 생산성 없는 행동이라는 의견[21]과 국민을 위한 정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당내 토론과 소통을 활발히 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라는 의견[22]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A%B1%B8









** 어느 권문세가의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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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시 : 2003년 3월 1일 (토) 20:00-21:00 1TV


◆ 담당 P D : 공용철 [781-3556] / 작가 : 권기경

◆ 주요내용 :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우리는 5천년동안 이어온 나라를 잃어버리고 말과 글까지도 잃게된다.

국권상실에 따른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은 커져가고

일제는 그런 조선 백성들을 포섭하기 위한 회유책을 시도한다.


한일합방에 공이 있다는 명목으로 당시 사회 지도층이었던 양반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수여하는데...

남작은 5만원, 백작 10만원, 후작에게는 15만원.

15만원은 지금의 약 30억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뿐 아니라 부부동반 일본여행을 주선해주었고 합방 후에도 양반들의 재산과 지위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일제의 이런 회유공작에 대부분의 양반 지배층들은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일제에 순응해갔다.

그러나 이에 따르지 않은 최고의 명문가가 있었다.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인 이회영 일가.

이회영 6형제는 일제의 회유에도 응하지 않고 분연히 망명을 선택한다.

최고의 재력과 지위를 지녔던 이들은 전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향한다.

당시 이회영 가의 재산을 환산하면,

소값으로 계산했을 때 약 650억원, 땅값으로는 2000억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위를 자랑하던 이회영 일가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데 주력한다.

그 결실이 바로 신흥무관학교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이후 10년동안 3500여명의 독립군을 배출한다.

졸업생들은 청산리전투, 쌍성보 전투 등 우리 독립전쟁사에 빛나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독립투사들의 모태가 되었던 신흥무관학교, 그 뒤에는 이회영 형제들이 있었다!

민족교육에도 힘썼던 그들은 서간도라 불리는, 중국의 동북삼성일대에 다수의 조선족 학교를 세우고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그래서 서간도에서는 지금도 이회영을 독립운동의 수령이라고 부른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이회영 6형제들.

그들은 가지고 간 모든 재산을 독립을 위해 쏟아부으며 온갖 노력을 했지만

육형제 중 해방을 맞이한 사람은 다섯째인 이시영뿐 이었다.

이회영을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은 낯선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번주 역사스페셜 '3.1절 특별기획, 어느 육형제의 독립전쟁'에서는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솔선수범한 이회영 일가를 통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 본다.


◆ 세부내용 :


1. 이회영 일가의 만주를 향한 망명길


조선 최대의 명문집안 이회영일가.

1910년 한일 강제합병이 이뤄지자 이회영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망명을 계획한다.

당대 최고의 가문이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지배계층을 회유하여 일제의 편에 서게 만들려는 상황에서 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만주로의 망명을 시도한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40여명의 일가족은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를 뚫고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2. 독립운동가들의 모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1911년 봄에 문을 연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는 10년동안 3500여명의 독립군을 배출한다.

청산리 대첩등의 활약을 보였던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

이 학교의 발기인은 이동녕, 이관직 등등 그리고 이회영이었다.

또한, 학교의 주인은 이회영의 형인 이석영이었으며 그는 학교의 재정을 충당했다.

만주로 떠날 당시 막대한 재산을 모두 처분했던 이회영일가는 독립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데 그 재산을 쏟아부었다.


3. 형제들의 독립운동


형제들은 다같은 독립을 위한 생각을 지녔으나 그 행동을은 조금씩 달랐다.

이회영은 미국에 위임통치를 요청한 임시정부와 결별을 하고 북경으로 활동지를 옮긴다.

이회영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새로운 이상을 받아들이고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그의 동생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임명된 이시영은 상해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4.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심이 되다.


이회영 6형제들은 각자 다른 활동노선을 걸었지만 조국의 독립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았던 독립활동.

결국 이회영은 옥중에서 죽음을 맞고 이석영은 혈혈단신으로 살다가 상해에서 죽는다.

막내 이호영은 자녀들과 함께 몰사하였고 이시영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그 사회의 지도층이었던 이회영 형제들은 행동으로서 자신들의 의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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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투리 2009.03.04 15:52
    친일파 후손들이 일제 시대때 얻었던 재산을 되찾으려한다는 기가막힐 뉴스 를 볼때....

    단순히 일요일과 겹쳐 아쉬운 3.1절 휴일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는 시기에....

    우연히 방송에 나온걸 보고 찾아서 올려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까지 받치신 분들을 생각해봅니다.
  • ?
    오늘 2009.03.08 12:17
    올려주신글 자세히 읽었습니다
    훌륭하신 그 분들을 너무 모르고......  그리고 역사속의 그 아픔들을 너무도 잊고 살아왔슴이
    부끄러웠습니다 
    좋은글 읽게 해주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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