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29 12:12

2009-07-29 복음묵상

조회 수 481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예수님의 하늘 나라에 대한 4번째 비유는 좋은 진주를 찾아 헤매는 상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좋은 진주가 ‘하늘 나라’라고 한다면, 좋은 진주를 찾아 헤매는 ‘상인’은 하늘 나라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노력하는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진주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시인 구상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구상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외가가 조선 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선생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 자부심도 대단했을 터였습니다. 시인은 한 때 사제직을 꿈꾸며 신학도가 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길을 바꾸고 일본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시인은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래서 저는 동경으로 유학 가서도 종교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교의 나라이기 때문에 종교학 커리큘럼 중 절반 이상이 불교경전에 대한 주석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고민은 신의 실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와 아울러 신의 섭리라든가, 교리 자체 등에 대한 많은 회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평안보다는 고뇌에 싸여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난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하며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치닫곤 했습니다.”
  구상 시인은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불교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던 것입니다. 시인은 좌정하여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의 ‘평안’과 십자가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는 예수의 ‘고뇌’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저주받은 영혼’으로 생각할 정도로 치열하게 갈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시인은 ‘폴 클로델’ 시인을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수(精髓)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그런데 유학 중이던 당시 제가 크게 위로와 위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20세기 노벨상 수상자의 한분인 폴 클로델이라는 시인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은 제가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프랑스 주일대사를 지낸 인물로서, 열아홉 살엔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신비 체험을 했는데 어느 정도 강렬한 체험인가 하면 자기는 성서에 씌어진 것보다도 더 명백히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증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만일 그대들이 신을 참되게 알았을 때, 신은 그대들에게 동요와 불안을 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평안’이 아니라 ‘동요’와 ‘불안’을 주는 신(神), 그분이 시인께서 폴 클로델을 통하여 알게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자 가톨릭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시인은 점점 눈이 열려 동양의 유수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지, 그 본질적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갔습니다. 시인은 이를 ‘해탈’이나 ‘도통’과 ‘십자가’의 차이로 압축합니다. 곧 동양종교에서는 이 세상의 고통을 피하여 ‘해탈’하거나 ‘도통’하려는 온갖 노력을 과정으로 삼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고통 자체를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해탈, 도통, 초탈은 고통을 피하고 평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여 사뭇 솔깃하게 들리지만 그게 어디 범상한 ‘그릇’들에게는 가능한 길이겠습니까? 그것을 꿈꾸기에는 인간 현실 처지가 갈등과 불안과 고뇌 투성이라는 것을 시인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예수님처럼 그런 고통의 현실 한 복판으로 들어가 자신의 몫은 물론 남의 몫까지 대신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시인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한 마디로 ‘유한성(有限性)에 대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동양종교에서는 ‘무한성(無限性)’을 꿈꾸고 스스로 무한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만 시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히려 ‘유한성’을 인정하고 거기서 구원을 희망하는 길이 옳다고 보셨습니다. 이를 시인은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 벗어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불안과 허망의 잔을 / 피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것이 구상 시인의 생각입니다. 시인은 욕망, 갈증, 고뇌, 고통, 불안, 허망 등을 ‘유한한’ 자신의 현실로서 정직하게 받아들입니다. 이 피할 수 없는 한계가 바로 ‘원죄(原罪)’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들을 송두리째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뒤따르는 삶에 필경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굳이 믿었습니다. 시인은 인간은 유한하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줄곧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인간을 구원에로 이끌어주는 것은 ‘신령한 구원의 손길’밖에 없음을 통감하고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은총 그것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소망했던 그 ‘손길’이었을 터입니다.
  이 짧은 시 안에 가톨릭 신앙의 핵이 장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이라면 온 몸으로 토로하는 신앙고백에 공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현주소에 대한 명철한 ‘앎’과 거기에 숨어 있는 구원도리를 통찰하는 ‘믿음’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시인 구상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안에서 진주 중의 진주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아멘!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