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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자 신앙인 김대중의 ‘삶과 신앙’

주님 사랑 행동으로 실천한 ‘참 신앙인’
보복하지 않는 ‘용서와 화해’의 신념 실천
바쁜 생활 중에도 기도 게을리하지 않아
발행일 : 2009-08-30

- 2007년 10월 10일 '사형 폐지국가 선포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고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가 되었음을 천명했다.
- 1996년 10월 동서화합 차원에서 대구 경북지역을 방문한 새정치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대구대교구청을 방문해 이문희 대주교와 환담했다.
“선하신 주여, 제게 당신의 은혜를 허락하소서. 세상이 제게 무가치한 것이 되게 하시고…온갖 부귀 영화, 자유 생명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을 잃는 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일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하소서.”

1534년 4월 17일 영국 런던탑. 르네상스 시대 가장 위대한 인문주의자이며 작가, 그리고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가 영국 교회 수장인 왕의 권위를 부인했다는 명목으로 감금돼 기도를 바치고 있다.

기도를 마친 그는 숯 한 토막으로 딸에게 편지를 쓰고 같은 해 7월 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랬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이 허락치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500여 년 후 한국의 한 교도소

토마스 모어란 세례명의 한 사내가 ‘내란음모사건의 주동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쿠데타를 위해 민중을 선동한 봉기’로 조작했던 것이다.

9월 17일,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1973년 8월 13일 생환해 돌아온 지 7년 만에, 또다시 죽음 앞에 놓였다. 그는 수많은 기도를 올렸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일생은 참으로 가시밭길의 그것이었지만 … 이러한 고난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이토록 크신 것인가 하는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훗날 「옥중서신」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된 이 편지는 다름 아닌 한국의 토마스 모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을 앞두고 쓴 처절한 신앙고백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삶은 토마스 모어 성인의 삶과 닮아 있다. 16세기 영국의 법관, 정치인, 외교관, 저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토마스 모어 성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법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행동했다.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매일 몇 시간씩 기도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치가이기 이전에 신자였으며 가족들에게 따듯한 사랑을 베푼 아버지였다.

신앙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 역시 깊은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행적을 쫓다보면, 삶 전체가 복음말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심’, ‘용서와 화해’, ‘평화’로 대표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철학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증거하고자 한 김 대통령의 신앙을 엿보게 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했다. 그것은 ‘양심’ 때문이었다. 그가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1954년 ‘부산정치파동’ 때문이다. 당시 정권 연장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자, 그의 ‘양심’은 행동하기 시작했다.

정치에 입문한 후 그는 네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1971년 5월 24일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당한 의문의 교통사고, 1973년 8월 8일 이른바 ‘KT 공작사건’으로 불리는 2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 그리고 19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1971~87년, 민주주의 최대 암흑기요 형극의 세월이었던 이 시기, 김 전 대통령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55차례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행동하는 양심으로써 정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든 시련을 딛고 일어난 ‘인동초’ 김 전 대통령은 마침내 1998년 2월 25일,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용서와 화해’의 신념을 실천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적대했던 이들에 대한 ‘정치 보복’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서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 몰고 갔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용서론’을 폈다.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그의 대북관은 그의 사상이 ‘평화’에 있음을 알 수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겨울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하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며 대북 평화 정책을 펼치고 평화의 힘을 보여줬다. 2000년 6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의 성과를 이끌어냈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사랑의 실천가

그러나 그는 위대한 정치가이기에 앞서 사랑의 실천가였다. 서울 서교동본당 총회장 박인길 씨는 “그 분은 나에게 대한민국 대통령, 고위 정치가이기보다 편안하고 온화한 미소를 띤 신앙인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오랜 세월 서울 서교동본당에 적을 두고 신자들과 친교를 나눴다. 신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나누며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서교동본당 사목협의회 고문으로 본당 대소사에 관여해왔다.

바자 때 외국 순방 시 받은 선물을 기증하고, 행사가 있을 땐 음식을 보내 신자들의 잔칫상을 마련해줬다는 것은 신자로서의 숨은 면모다. 그의 가족사랑은 또 어떤가. 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으며, 옥중에서 자녀들뿐만 아니라 며느리들에게까지 펜을 들었다.

“나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너를 보고 있으며 장래를 기대하고 있다-큰아들 홍일에게”

“아버지는 너의 인간성과 능력을 신뢰한다-작은 아들 홍업에게”

“아버지가 너를 위해 매일 기도를 그치지 않겠다. 사랑하는 홍걸아!-막내아들 홍걸에게”

그의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그 스스로가 ‘옥중서신’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고 밝혔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이 현재 나의 믿음을 지탱하는 최대의 힘이며, 언제나 눈을 그 분에게 고정하고 결코 그 분의 옷소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8월 23일 그의 영결식,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가가 울려 퍼졌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교회는 그를 떠나보냈다. 전 생애를 통해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그의 마지막 선교현장이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해도 그 분을 사랑하겠소. 나는 모든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해도 그 분을 믿겠소. 모든 과학자들이 그 분의 부활을 조롱해도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소.”(1981년 1월 17일 옥중서신 중)
- 1998년 2월 14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나라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위한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김대중 대통령이 나란히 앉아 있다.
임양미 기자
( sophia@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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