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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야그'를 쓰는 날이면, 빈 테이블 노트북 위에, 한 사람 얼굴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비 없이 거센 바람이 쳤던 6월 말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 오래된 기억이 하나씩 사라지듯, 소중했던 ㅁㅋ이름들 또한 반갑지 않은 데자뷰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비가 몰아치는 7월이다. 기억의 잔상들이 비에 씻기듯, 삶을 고민하는 자는 가끔 자기의 삶을 내려놓는다. 욕심과 바람만큼 그 끝이 닿지 않는 까닭이다.

오늘 만나는 이는, 자기의 삶을 멋지게 드라이브하는 친구다. 자신의 삶처럼 누군가의 욕심과 바람이 되고 싶어지는, 누군가의 음악과 삶을 멋진 편곡과 연주로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편곡자 혹은 디렉터 혹은 연주자라고 부른다. 가톨릭 내에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편곡과 연주를 하고 있는 이, 베이스 기타리스트 김지수 루카를 만나본다. 그가 운전하는 멋진 가톨릭 음악들의 길로 떠나 보자. 

먼저 그가 멋지게 편곡한 생활성가 가수 나정신 체칠리아가 부른, ‘날아 봐’ 영상을 나눠 본다.

'찬양 거룩한 기쁨' 357회 중 '날아봐', 윤순 로사리아 Yun Sun’s 1st CONCERT Fingers, Touch in Soul


그에게 첫 음악 시점을 물어본다.

“어릴 때부터 여러가지 음악들을 들으면서 자라났어요. 늘 음악으로 살아가시는 아버지께서는 들국화, 사이먼 앤 가펑클, 한대수 같은 포크 음악을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제가 클래식은 듣기만 했지 배워 보거나 연주를 해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포크 음악은 아직도 저에게 음악적 기둥과도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성당에서 중고등부 성가대 지휘를 하셨어요. 상훈이 형이랑 같은 본당이었죠? 부천에 그 지하에 있던 성당. 하루는 아버지께서 집에 이상하게 생긴 기타를 가지고 오셨어요. 통기타나 일렉기타는 집에서 자주 봤는데 그 기타는 정말 이상했어요. 훨씬 넥(기타에 지판이 있는 곳)이 길었는데 줄이 4개 밖에 없고 그 줄도 엄청 두꺼웠어요. 그리고 기타처럼 코드를 잡는 것도 아니니 쉬워 보여서 시작하게 됐어요. 첫 입문은 너무나 쉬운 악기인데 하다 보면 점점 어려워지는 악기가 바로 그 이상한 기타, 베이스 기타였습니다. 단순하게 근음(코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저음부)만 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드럼의 비트에 맞춰야 되고 기타와 건반의 화성과 선율 사이에서 잘 조율을 해야 돼요. 드럼, 기타, 건반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 연주할 수 없는 악기가 베이스라고 생각이 들고 아직도 참 어려워요”

베이스 기타가 밴드에 근간을 이루듯, 그 근간이 흔들리면 모든 악기가 흔들린다. 김지수 루카에게 베이스 기타와 함께했던, 중고등부 성당 생활에 관해 물어본다.

“그렇게 성당에서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고 간간히 친구들과 스쿨밴드도 했었어요. 스쿨밴드는 어쩐지 저랑 잘 맞지가 않았어요. 그때 당시는 록 음악이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던 시대였는데 록의 베이스는 어쩐지 좀 재미가 없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화성이 살아 있고 선율이 아름다운 음악이 좋았는데 록은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았어요. 반면에 성당에서 연주했던 생활성가가 저한테는 잘 맞았어요. 특히 김정식 로제리오, 신상옥과 형제들, 갓등중창단 같은 생활성가를 감명 깊게 들었고 특히 작고하신 유승훈 선배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베이스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 그리고 전체적인 음악디렉터, 프로듀서로서 유승훈 선배님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을 했었는데 지금도 유승훈 선배님께 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천교구에는 중고등부 '바다의 별' 축제가 있는데 그게 제가 고등학교 때도 있었어요. 저희 본당 밴드도 그 축제에 여러 번 참여를 했었는데 제 바로 위 기수 선배들이 본당 최초였고 저희 기수는 두 번이나 참여를 했었어요. 제 자랑은 아니지만 인천교구 생활성가인들 사이에 부천의 중2동 성당에 베이스를 잘 치는 학생이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었습니다. 그때는 고등학생이 펜더베이스(일렉 기타와 일렉 베이스에서 가장 유명한 메이커 미국산)를 갖고 있는 경우가 희박했는데 저는 그 악기를 갖고 있었어요. 그 당시는 그것만으로도 주목을 끌던 시대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가 다니던 인천교구 부천시 중2동 성당 청년 성가대에 신상옥 안드레아 형님께서 지휘를 하고 계셨어요. 저도 청년 성가대에서 베이스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상옥 형님께서 저를 이뻐하셨어요. 그래서 예전에 있었던 생활음악연구소(현 가톨릭문화원)의 음악 피정과 공연에 가끔씩 저를 불러 주셨어요. 그때 상훈이 형하고도 처음 만나게 되었죠. 제 위로 레전드 베이스 형님들이 계셨어요. 유승훈 형님, 정철 형님. 그렇게 쟁쟁하신 선배님들이 계셨는데 제가 거기에 함께할 수 있어서 참 영광이었어요. 그러다가 저를 불러 주시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군대에 가기 전까지 참 많은 공연을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거의 전국 순회 공연급이었네요. 그리고 인천교구에 있는 '주경야락'이라는 교리교사밴드에서도 베이스를 연주했었어요. 제가 교리교사는 아니었지만 바다의 별 축제를 통해 인연이 된 주경야락 멤버들과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지수 루카. (사진 제공 = 김지수)
김지수 루카. (사진 제공 = 김지수)


“군대를 24살에 갔어요. 제가 워낙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스타일이라 군대에 가면 손가락도 다 굳고 음악을 못하게 되는 줄 알았거든요. 원래는 지금 없어진 26기계화 보병사단 불무리 부대에서 장갑차 소총수 생활을 했었어요. 막상 군생활을 해 보니 할 만하다 싶었어요. 성당에도 주말마다 열심히 갔고 성가대 활동도 하게 되었어요. 군대에 있는 성당들은 대부분 영외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군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게 또 외출의 느낌이 나서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성당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군종 신부님께서 저를 눈여겨보시고 저를 사단 천주교 군종병으로 보직을 변경시켜 주셨어요. 그래서 장갑차 부대를 떠나서 성당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일과 시간 외에는 얼마든지 음악 공부를 해도 좋다는 군종 신부님의 배려에 미디와 화성학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20대 초반 군을 전역한 친구들에게 삶에 관한 고민은 냉혹하게 현실로 다가온다. 그가 군 전역후 음악 생활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 성가활동의 근원은 역시나 ‘생활음악연구소’(현 가톨릭문화원) 그리고 ‘가톨릭문화원’이었던 것같습니다. 제대 후에도 다시 그곳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네요. 당시 윤순 로사리아, 최상준 리카르도랑 주로 같이 연주하게 됐었고, 최상준 리카르도는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알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친구이자 형이에요. 나이는 저보다 한 살 많았지만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세 명이서 참 많은 성가 음반에 참여를 했었습니다. 다 나열을 할 수는 없지만.... 거의 모든 생활성가 가수들의 음반 작업에 전부 참여했다고 생각이 되네요.”

“원래는 작고하신 유승훈 선배님께서 음반 작업을 도맡아서 하고 계셨어요. 윤순 로사리아 자매도 승훈 선배님과 함께 작업을 하고는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승훈 선배님께서 윤순 자매에게 편곡 일을 하나둘씩 맡기면서 윤순 자매가 성가 가수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모습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고 제가 음반 작업에 참여해 본 경험은 그때까지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좀 흐르고 윤순 자매가 편곡을 단독으로 담당하게 되는 음반들이 생기면서 저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본격적으로 처음 작업하게 된 음반은 2007년 최현숙 아가다 1집이었습니다. 아가다 자매님의 아우라가 너무나 대단해서 상당한 부담이 됐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우리들의 한 가지 기준이 있었는데 가급적 천주교 신자인 뮤지션들과 음반 작업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기준이 옳았는지 어땠는지 평가할 순 없을 것입니다. 물론 비신자이면서 좋은 뮤지션들이 너무나 많지만 그래도 신자들 손으로 만들어 낸 음반이 더 의미가 크지 않을까 싶었어요. 지금 그 음반을 들어 보면 미숙한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가톨릭 신자들 손으로 만들어 낸 음반에는 가톨릭의 정서가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최현숙 아가다 1집이 발매가 되고 반응이 괜찮았는지, 그 후로 작업이 끊기지 않고 몇 년간 계속 지속이 되었습니다. 관련된 ‘창작생활성가제’, ‘주찬미콘서트’에서도 많이 연주를 했었고 특히 KYD 공연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네요. 권성일 미카엘 형과 함께했던 여름 음악 캠프도 빼놓을 수 없네요.”

 

영광송의 끝말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첫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니체.... 그들은 최소한 제도권 내의 교회와 처절하게 싸움을 진행했던 이들이다. 생활성가인들도 많은 부분에서 제도권 내의 교회와 싸운다. 아니, 드러나게 싸우는 것이 아닌, 그저 등을 돌리는 소극적 싸움이 대부분이다. 제도권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한, 생활성가인들은 그들의 광장 혹은 예술적 기도를 보여 줄 마당이 없다. 김지수 루카에게 20여 년 동안 성가인으로서 살아온 날들에 관해 물어본다.

“제가 나이가 제법 많지만 예전에는 비교적 후배 격에 속하는 나이였어요. 그러다 보니 선배님들께 기대하는 것도 많았고 한국 교회에서 생활성가의 현실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이제 마흔 살이 넘어 보니 저는 예전 그 선배님들 흉내도 못 내겠더라고요. 일단 선배님들은 가급적 밴드 연주로 피정 및 공연을 진행하려고 하셨어요. 그러나 예전과 같이 지금도 한국 가톨릭의 현실과 상황이 밴드 연주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성당의 구조 자체가 소리 울림과 반사가 심한 부분도 있고 각 본당의 음향 시설이나 악기들도 많이 열악한 곳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선배님들 본인께서 손수 악기를 빌려 오시고 음향 장비까지 갖고 다니시고 그랬던 것이 대단한 열정이라고 지금에 와서야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MR을 틀거나 간단하게 기타나 건반 정도로 진행을 하면 편하셨을 텐데, 그래도 다 함께 같이 가자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고군분투하셨던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요새는 많이 간소화 된 것 같아요. 물론 그게 나쁘고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장에서 음악의 힘은 다소 떨어지기 마련이라 좀 아쉽긴 합니다. 예전에 그렇게 고군분투하셨던 선배님들도 결국 바뀌지 않는 교회의 현실 앞에 이제는 힘이 좀 빠지신 것처럼 느껴져서 속상하기도 해요. 가톨릭생활성가 연주인들의 기둥과도 같았던 유승훈 선배님께서 너무 일찍 떠나신 것도 마음이 많이 허전하고 기댈 곳이 없어진 느낌도 듭니다. 물론 유래 없던 코로나19 여파의 영향도 컸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성당을 다녔고 성당 음악의 이미지는 정숙한 성가대 합창과 파이프 오르간 연주 예요. 제가 베이스를 연주하고 밴드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톨릭의 모든 음악이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 기존 고유의 음악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님들의 노력으로 그래도 교회가 생활성가를 많이 받아들였어요. 참 기쁜 일이고 세월이 오래 걸렸네요. 그러나 조금 더 많이 확장되고 보급이 되면 어떨까 싶어요. 요새 성당에 중고등부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예전만큼 안 보입니다. 물론 코로나19 여파도 있겠지만 이런 현상은 코로나 전에도 같았습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젊은 꼰대 같지만요.... 제가 20대 시절에 생각해 보면 저희 성당 청년 미사에 참석하는 청년들이 못해도 100명은 훨씬 넘었던 것 같아요. 시대가 변하기도 했지만요. 그때는 성당이 일종의 사랑방(?) 같은 곳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성당에 가면 친구들이 있고 일종의 모임 같은 곳이기도 했어요. 신앙의 문제는 개인적인 부분이니 제가 거론하기에는 조금 어렵습니다. 신앙의 전문가가 아니기도 하고요. 지금은 굳이 성당이 아니더라도 즐길 것들이 많고 소통할 곳도 많아졌고 성당은 좀 '재미가 없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진 것 같아요. 그러나 요새 청년들은 예전 청년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와 불안감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한국 사회가 지금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제는 중고등부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교회는 줄 수 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생활성가가 있어요.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특성상 사제의 방침 위주로 교회가 운영된다는 점, 그리고 사제들이 계속 인사 발령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달란트가 있는 사제들이 뜻을 지속적으로 펼칠 수 없는 부분이 현실적인 어려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성당 신부님들은 공무원, 교회 목사님들은 자영업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표현이 다소 종교적이지 않다는 느낌은 있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돼요. 목사님들은 열심히 하실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교회가 부흥이 되고 성도들이 계속 유지가 되고 그런 부분이 목사님들에게 아주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신부님들은 그런 면에서는 부담감이 좀 덜한 것 같아요. 물론 목사님들에게는 없는 또 다른 고충이 신부님들에게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구조적인 문제들이 가톨릭교회에서 생활성가가 더 확장되지 않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은 들어요.”

 

김지수 루카에게 2013년 브라질 세계 청년대회 준비와 그때 일들에 관해 물어본다.

“윤순 자매, 최상준 형제랑 함께 오랜 시간 성가 활동을 하다 보니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었어요. 정작 많은 음반과 공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우리 것은 없다라는 생각이죠. 셋이서 의기투합을 해서 밴드를 만들게 되었는데 밴드의 방향성이 많이 고민됐었습니다. 연주음악 위주로 할 것인지 보컬이 있는 형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요. 그래도 성가 음악 특성상 보컬이 있어서 가사 전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컬을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컬이 최준익 막시모 친구예요. 개인적인 활동으로도 바쁜 친구였는데 우리들의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던 것이 아직도 고마운 마음으로 남습니다.”

“그렇게 각자 개인적인 활동과 밴드를 병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2013년에 브라질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회 기간 중에는 전 세계 각 국가의 성가인들이 공연을 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조사를 해 보니까 그간 한국팀이 참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한번 참여해 볼까라는 의견들이 모아졌고 프로필을 작성해서 브라질 대회 주최측으로 참가 신청을 했어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대회 측에서 수락을 했고 브라질로 가게 되었어요. 한국적인 성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사실 저희가 그때 연주하던 곡들은 특별히 한국적인 요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해금을 연주하는 정겨운 카타리나 자매가 동행을 하게 되었고 그 해금 연주에 맞춰서 편곡 작업도 다시 했었습니다.”

“그리고 대회 참여 진행 과정에 제가 브라질 대회 측과 소통을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때는 브라질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과정이 참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우여곡절 끝에 브라질에 입성을 해서 예정보다도 더 많은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청년대회 자체 공연도 좋았지만 저는 상파울로 한인 성당에서 하게 됐던 공연이 가장 기억에 크게 남습니다.

아리랑을 저희 밴드 버전으로 편곡을 했었는데 그 아리랑을 듣고 눈물을 훔치시던 한인 성당의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한 가지 가장 크게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대회 마지막 날에 있었던 메인 공연에 저희가 참여하지 못했어요. 교황님과 함께하는 무대였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큰 비가 내려서 메인 공연장이 폐쇄가 되었고 그러면서 모든 음악팀들의 공연 스케줄이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결국 공연장이 다른 도시로 변경 되었고 저희 공연 날짜도 뒤로 밀려버렸어요. 그런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 날짜 하고 맞지 않았고 결국 그 무대에는 오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영상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렇게 제가 2013년도에 처음 브라질에 가서 그 나라의 가톨릭 문화를 경험해 보니 정말 대단한 가톨릭 국가였습니다. 가톨릭 전문 방송국도 몇 개씩 있었고 브라질 사람들의 신앙심은 정말로 대단했어요. 전 세계에서 단일 국가로 가장 많은 가톨릭 신자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나죠. 제가 그 전에도 이미 많은 나라로 배낭여행을 떠났었는데 브라질과 같은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던 나라는 없었어요. 그렇게 브라질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김지수 루카. (사진 제공 = 김지수)
김지수 루카. (사진 제공 = 김지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면, 주인공 가후쿠와 대리운전자 미사키는 어디론가 간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쓰레기 혹은 폐기물 처리장이다. 그 모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눈처럼 아름답게 날린다. 나의 고민거리가, 나의 부끄럽던 기억이, 나의 소중했던 사람들이, 나의 알몸이, 모두 한데 섞여 눈처럼 흩날린다. 시인 보들레르의 말처럼, ‘나를 더 반하게 하는 그대의 냉혹함까지’.... 삶은 나를 더욱 아름다운 세계로 안내한다. 그에게 힘들었던 시기와 지금 가톨릭 생활성가에 관해 물어본다.

“2013년도니까 제가 33살이었네요.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는데 오른손 중지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수많은 병원을 전전긍긍했는데 그 어떤 의사도 진단을 내리지 못했어요. 현대 의술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눈으로 진단이 내려져야 그것에 맡는 처방도 따라오기 마련인데 저의 경우는 좀 어려운 케이스였나 봅니다.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는데 베이스 기타 줄을 튕길 때 유독 그러니 참 어려웠어요. 결국엔 좀 오랜 시간 동안 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 연주 활동을 중단하게 됐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저 때문에 당시 포엠밴드 멤버들이 참 피해를 많이 보고 주변 동료들한테도 안 좋은 영향을 많이 주었는데 지금도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같았으면 그렇게 활동 중단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최대한 손가락을 쓰지 않는 방향으로 활동을 지속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어렸던 데다가 위기 대처 요령도 잘 없었던 것 같아요. 가수로 치자면 성대결절과도 같은 것인데 아무튼 어려웠습니다. 당시 상황이.... 음악만 하던 제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 무척 고독하고 상심이 컸어요. 그러던 도중 브라질에서 느꼈던 그 따듯함과 그곳의 가톨릭이 생각났습니다. 2014년도에 브라질에 혼자 가게 되었고 포르투갈어 공부도 했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총 6번 브라질에 방문하게 되었네요.”

“제가 브라질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곳의 성가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브라질의 가톨릭도 한국의 가톨릭과 물론 같게 느껴졌습니다. 가톨릭의 전례는 전 세계 어디나 똑같으니까요. 브라질도 개신교 CCM이 음악적으로 더 화려하고 규모도 큽니다. 한국하고 똑같은 상황이죠. 제가 2013년도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 보았던 화려했던 브라질 생활성가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현실적인 부분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세계 최대 가톨릭 국가답게 각 성당마다 생활성가 활동들이 활발할 줄 알았는데 거기도 역시나 성음악 위주고 어쩌면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국 가톨릭의 생활성가인들이 참 잘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한국 사람들이 뭔가를 할 때 조직적으로 이뤄서 하는 건 참 잘하는 것 같은데 그 특성이 어쩌면 가톨릭교회랑도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요새 브라질에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옮겨가는 신자들이 많다고 해요. 물론 신자 수는 가톨릭이 아직은 개신교보다 압도적으로 많긴 하지만 거기도 뭔가 좀 더 열정적인 신앙을 원하는 사람들은 개신교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성가 활동을 하는 신부님들이 브라질에 많습니다. 아마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되요. 아무래도 워낙 큰 나라고 신자들도 많으니까요. 거의 스타급(?)으로 각종 가톨릭 방송에서 그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어요. 참 언급하기 어렵고 예민한 부분이고 욕을 먹을 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신부님들이나 수도자들이 노래를 하면 신자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음반을 내시면 신자들이 많이들 구매하는 것 같고요. 브라질도 똑같습니다. 아무래도 신자들 입장에서는 더 와닿을 것입니다. 본인들과 같은 일반 신자의 찬양보다는요.”

“그런데 한국 가톨릭과 브라질 가톨릭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곳은 한국과는 달리 수직적인 교회가 아닌 것으로 보여요. 그것은 한국 사회의 특성과도 일치하는데요. 쉽게 말해서 한국처럼 사제를 드높여 주는 그런 교회는 아닌 것으로 보였고 한국 교회에는 신자들의 뜻대로 무엇인가 진행되기보다는 사제의 뜻이 강하다는 인상이 있는데요, 그곳은 서로 협의하에 진행되는 부분이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20년이 넘도록 생활성가 연주를 해 오고 있는데요, 가톨릭이 갖고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문화적인 열등감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느꼈던 적이 많습니다. 같은 무대에 생활성가인들과 대중음악인들이 함께 오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중음악인들은 그런 무대나 행사에서 주로 가장 중요한 피날레 부분을 맡고는 합니다. 물론 그런 가수들의 무대가 중요하겠죠. 페이도 생활성가 가수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비쌀 것이고요. 신자들도 더 좋아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연예인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또 좋아하잖아요. 그러나 막상 교회를 더 사랑하고 더 신앙의 울림을 외치는 생활성가인들의 무대에 더 큰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던 것은 제 욕심이자 바람이었을까요?”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고생해도 어지간하면 신자들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자인 연예인이 어쩌다 한 번 성당에 와서 성가 한 곡 불러주면 거기에 엄청나게 큰 감동을 받는 것 같았어요. ‘오! 저 사람도 천주교 신자였어? 어쩐지 더 은혜롭게 들리는데?’  물론 신자 연예인들의 활동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은 자기 가족 챙기기를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결국 교회에서 쓰일 생활성가나 생활성가 미사곡이나 다 생활성가인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은 아마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성가인들끼리 이런 얘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성가인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고생하지 말고, 차라리 대중음악 쪽에서 유명해지면 교회에서 굽신굽신거리면서 초청하고 싶어할 거라고요. 이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생활성가인들도 더 많이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음악적인 퀄리티로는 대중음악이 더 훌륭할 수밖에 없죠. 그렇지만 앞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결국 교회에서 쓰일 생활성가는 생활성가인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김지수 루카와의 인터뷰는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가 풀어 놓은 이야기들을 이곳에 다 풀어놓지 못했다. 많은 예술창작들이 그러하듯, 그들이 풀어야 할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는 ‘성을 쌓는 이’보다,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예술인들이 때로는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떠오르는 어떠한 생각도 모르게(incognito) 지나가도록 하지 말 것’ 이라고 얘기했던,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지나갔던 시간의 기억들과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길들에 주저하지 말자. 김지수 루카의 말처럼, 앞으로 다가올 멋진 모습들이, 욕심에 그치지 않고, 바램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김지수(루카)


서울재즈아카데미 베이스과
서울디지털대학교 실용음악학 학사
생활음악연구소, 가톨릭문화원 객원 연주 활동
인천교구 교리교사 밴드 주경야락 활동
다수의 생활성가 음반에 베이스 연주, 작.편곡, 프로듀싱으로 참여
2013브라질 가톨릭 세계청년대회 한국 음악팀 현지 공연 기획 및 참가
주찬미, 창작생활성가제 방송 활동

 


신상훈(시몬)
Alma Art 가톨릭문화원 음악팀장 1999년
신상옥과 형제들 창단멤버 1992년
서강대 철학과 졸업 1998년
sbs효과실 음악감독 1998년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2015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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