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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성가의 역사

  생활성가란 가톨릭 교회에서 기존에 불리우던 전례성가 이외의 새로운 노래들을 일컫는다.개신교회에서는 찬송가,복음성가,CCM 등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분류를 하지않으며, 굳이 분류를 한다 하더라도 모호한 면이 많다.

「생활성가」라는 용어는 전혀 다른 뜻과 용도로 이미 그 전부터 쓰여져 왔지만 지금과 같이 교회음악의 한 장르로 처음 공개적으로 사용했던 김정식에 의하면, 생활성가란 한 마디로 ’삶 속의 찬미(Hymnes In Life)’라고 정의된다.

  전례성가로 신앙생활을 다 표현하거나 채워낼 수 없었던 대다수 신자대중들의 정서를 대변하여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내었고, 이것들이 젊은이들과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불리우다가 전례에까지 도입 활용되었다.

  이런 생활성가의 시작이 어디인가를 가늠하는 것은 쉽지않고 별 의미도 없다. 기독문화의 오랜 전통을 지닌 서양에서도 복음성가의 시작이 어디인지를 구분짓고 정의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하고 다른 이는 미국의 흑인영가에서 발전하였다 하나 현재 쓰이는 노래중에 어떤 장르의 효시를 따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터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이문근 신부님께서 1960년대에 <가톨릭 문학>이라는 잡지에 기고하신 글을 보면 ’교회 음악에 쟈스(아마도 쟤즈)를 도입하는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하에- ’어떤 장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그 음악을 부르고 듣는 이로 하여금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동경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그 당시부터 생활성가와 같은 대중성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굳이 거슬러 따져 보자면 아마도 그 직후인 60년대 말부터 광주교구 살레시오 수도회의 원선오 신부님과 윤선규 신부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분은 당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 번지고 있던 새세대 운동(Gen Movement)에서 양산된 새로운 노래들(’젠성가’로 불리웠음)을 번안하여 교회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보급하였고 자연스럽게 연주와 편곡에 능하셨던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창작성가를 만들어 함께 보급하셨다. 다만  광주교구라고 하는 지역적 여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고 당연스럽게 자리매김도 안되고 있다고 본다.

  이보다 조금 늦게 부산교구에서 수원교구로 옮겨와 사제가 되신 이종철 신부님께서 새로운 성가를 많이 만드셨고, 서울 교구 몇 개의 성당을 통해 보급되었다. 메리놀회 조영호 수사님께서는 이상으로 언급된 두 분의 새노래를 중심으로 외국번역곡을 합하여 ’가톨릭 공동체의 성가집’을 내게 되는데, 이것이 전례성가집 이외의 새로운 노래집으로는 최초라 여겨지므로 굳이 생활성가라 명명하지 않았더라도 아마도 생활성가의 효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무렵 바오로딸 수도회에서는 외국곡을 번안하여 몇 개의 음반을 내 놓았는데, 음반으로 본다면 이 또한 처음이 될 터이나, 비공식으로 녹음하여 세상에 돌아다닌 젠노래 음반과 시기적으로 누가 더 우선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후 이러한 노래들이 70년대를 이끌어 주다가, 70년대 말쯤에 본격적인 창작생활성가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김정식의 노래들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그는 이 시기에 이 해인 수녀님의 시에 곡을 부쳐 당시 마땅히 부를 노래가 많지 않았던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도 ’사랑’ ’이 시간 주님께’ 등 국내 작곡가들에 의한 복음성가가 탄생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전례 밖 성가의 시작은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같은 때라고 보아야 한다.

  80년대 초반에 성령쇄신 봉사회에서 활동하던 권오륜, 가나안 찬미그룹에서 많이 불려진 노래들(대부분 성모신심을 찬미하는)을 만들었던 이필호등이 활동하였는데, 1984년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권오륜은 미래의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신념으로 가톨릭 맹인선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글로리아 찬미선교단’과 김정식을 접목하여 ’가톨릭 생활성가 찬미회’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후 이 단체에 의하여 최초의 공식 창작생활성가 음반과 책이 ’김정식 로제리오 생활성가’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된다.

  이후 80년대의 교회내에서는 이들이 발표한 노래들과 서울,광주(뒤이어서 수원)의 신학교 학생들이 만들어낸 창작 노래들이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불리워졌고 80년대 말 ’파리 그레고리오 성가대’의 초청으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김정식은 바오로 딸 수도회의 요청으로 함께 협력하여 음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김정식의 권유로 ’창작성가 공모’를 하게 된다.

공모후 입상곡은 음반으로 제작되어 보급되었고 3년간 이 일을 한 후에는 신상옥이 뒤를 이어 이 일을 하게 된다. 물론 신상옥은 이 일 외에도 자신의 창작곡들과 기존의 공동체 성가나 개신교 복음성가들을 바오로 딸 수도회와 협력하여 음반으로 제작하였고, 교회안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서 생활성가라는 장르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게된다. 이 일 외에도 신상옥은 서울대교구 교육국,CCK 와 협력하여 ’청소년성가집’을 발간하는 일을 하게되었고 이 책 또한 교회내에 생활성가를 보급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평화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생활성가의 보급은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고 이후 많은 생활성가 가수와 작곡가들이 세상에 나왔지만, 오랜동안 우리나라에 잔존해온 방송국과 대중가수라는 도식적인 악순환 고리의 모순과 방송이라는 매체가 지닌 역기능의 한계를 다는 극복해 내지 못한 상황이고 ’기쁜 소식’만을 담아 부르게 되는 생활성가의 순수성과 아직은 부조화속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생활성가라는 장르가 마치 방송꺼리를 채워주는 정도 이상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실속에서 생활성가가 교회 미래의 희망이라는 신념을 가진 박종인PD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PBC 창작성가제’가 탄생되었고 올해로 3회 째를 맞이하면서 주위의 많은 후원과 호응을 끌어내는 데는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본래의 목적인 좋은 생활성가의 발굴과 보급에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 로제리오 kimrogerio@hanmail.net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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