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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성주간 입니다. 성주간 특집으로  예수살렘입성 명화를 올렸으며, 이어서 J.S. Bach의  Johannes-Passion 을 올리겠습니다.

장편이며, 해설이 너무길어서 2편으로 나누겠습니다. 이에 대한 곡은 CJ분이 별도로 올릴예정 입니다.(예고 하실지는 모르겠구요)

나름 고생하면서 올린것이니 성주간을 맞이 해서 한번쯤 유심히 보시길 권합니다.

이어서, Matthew Passion와 Stabat Mater,그리고Requiem 부활전야에는 Missa곡을 올릴 예정입니다

전부 장편이라 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기도 부탁 드립니다.

먼저 요한 수난곡 입니다(2011년4월15인가요? 명동성당에서 연주회가 있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신약성서의 《요한의 복음서》 제18∼19장에 의거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의 이야기를 쓴 종교성악곡 입니다.
빅토리아 ·라소 등의 라틴어로 된 가톨릭용 작품과 쉬츠 ·헨델 등의 독일어에 의한 프로테스탄트용 작품 등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J.S.바흐의 작품으로 이는 라이프치히시의 위축으로 1723년에 작곡되고 1724년의 성금요일(4월 7일)
라이프치히의 토마스교회에서 초연되었다. 《♭단조미사곡》(1724∼1749) 《마태수난곡》(1729)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734)와 함께
그의 4대 교회음악으로 꼽힌다. 이 곡은 독일어 가사에 의한 합창 ·아리아 ·레치타티보 ·관현악을 사용한 극적인 박력이 넘친
대곡으로 모두 2부 68곡으로 이루어졌으며 연주에는 약 2시간이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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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H Johannes Passion (CD Reissue cover).jpg 

 

 1717년 3월 26일의 성 금요일 저녁기도 전례에 오라토리오 수난곡을 소개했을 때, 이것이 훗날 서양음악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는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7세기 중반 이후 북독일의 중요한 도시들에서 이 장르, 그러니까 표준적인 수난사 서술에 자유롭게 만든 시에 붙인 명상적인 아리아와 코랄(오블리가토 악기로 반주하는)을 가미한
장르가 성행했지만 보수적인 라이프치히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얼마 안 가서 토마스 교회에서도 오라토리오 수난곡을 도입한 것을 보면 이런 혁신은 금방 충분한 지지를 얻었던 것 같다.
이때가 1721년으로, 신임 칸토르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설교자들은 전통적으로 수난 기사의 각 장면마다 성경 낭독에 대한 해설과 더불어 명상을 덧붙였는데,
대개 1인칭으로 된 생생하고도 묘사적인 시(詩)였다. 이런 시는 종교적인 저작물에 영감을 주어서 풍성한 유산을 이루었으며 그중 일부는 음악을 붙이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그 결과 또 다른 차원의 성서 주해가 된 셈이다. 그 결과 탄생한 오라토리오(성서 서술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각각 설교의 앞 뒤에 노래하도록 만들어졌다.
그 중 가장 인기 있었던 수난곡 대본은 바르톨트 하인리히 브로케스가 쓴 ‘세상의 죄를 위해 고난 받고 죽으신 예수(Der far die Stunde der Welt Gemarterte und Sterbende Jesus)’로,
이 대본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대본가가 만든 단축본의 형태로 바흐의 요한 수난곡에도 삽입되었다.
 
GENESIS
바흐가 1724년에 요한 수난곡을 작곡했을 당시, 4월 3일자 시의회 회의록에 따르면 연주 장소를 놓고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신임 칸토르는 확실히 이 해에는 수난곡을 니콜라이 교회에서 연주하라는(그래서 양대 교회에서 해마다 번갈아 수난곡을 연주하라는) 시의회의 결정을 무시하고서
토마스 교회에서의 연주에 사용할 대본을 인쇄했다. 바흐는 니콜라이 교회의 합창석에 여분의 공간이 마련되고 하프시코드가 수리된 다음에야 시의회의 지시를 따랐다.
바흐는 바로 같은 작품을 되풀이해서 연주하지 않기 위해 여러 해 분량의 칸타타 사이클을 쓴 작곡가로서는 특이하게도?다음 해인 1725년에도 요한 수난곡을 다시 연주했는데,
이때에는 작품 내용에 몇 가지 손질이 가해졌다. 수정 작업 중 절반 가량이 코랄에 근거한 악장을 덧붙인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의 연주는
그 해에 만들어진 코랄 칸타타 사이클과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바흐는 요한 수난곡을 1730년 무렵에 다시 연주했으며, 이번에는 첫 번째 판본으로 돌아갔지만 마태 복음서에서 가져온 두 곡
(베드로의 후회 장면과 예수의 죽음 직후에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 장면)을 삭제했다.
1730년대 후반 무렵에 요한 수난곡에 다시 손을 댔을 때는 정서한 자필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악보에 꼼꼼한 수정 작업이 많은 것을 보면 아마도 작품의 결정판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20페이지 정도를 작업한 후에 작업을 중단했고 그 다음부터는 나중에 필경사가 완성했다. 바흐가 새로운 악보를 왜 중간에 치워버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가장 그럴 듯한 이유는 아마도 1739년 3월 17일자 시의회 회의록에 나오는 보고서에 담긴 중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시의회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성금요일의 음악 연주를 금지하라는 지시를 전하기 위해서 서기 한 명이 파견되었다. 바흐는 서기에게, ‘이런 일은 항상 있어 왔으며,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 하면 어쨌든 이런 일은 얻는 것도 없이 짐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 행정관에게 연주가 금지되었다고 알릴 것이다. 만약 가사 내용 때문에 금지령이 내린 것이라면, 이 가사는 이미 여러 번 연주되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시의회가 왜 바흐의 수난곡 연주에 제재를 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쩌면 오라토리오 양식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1732년에 경건주의 작가인 크리스티안 게르버(Christian Gerber)는 당시 작센 지역에서 연주되고 있는 극장풍 수난곡에 대해 불평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에 충격을 받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부활해서 우리 예배에 참석해 이처럼 으르렁거리는 오르간과 숱한 악기 소리를 듣는다면,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자 자신들의 후계자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글에서 언급하는 작품이 실제로 요한 수난곡이라면, 대본에 대한 의구심 내지 유보 때문에 이미 여러 번 연주되었던 작품을 몇 번이나 개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쩌면 브로케스 전통의 바로크풍 시가 이미 유행에 뒤쳐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요한 수난곡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판본(1749년)을 보면 세 개의 아리아 대사를 바꿔서 보다 묘사적이고 회화적인 내용을 삭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CHARACTER & STRUCTURE
바흐의 요한 수난곡에 나오는 자유시는 복음서의 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른 세 명의 복음사가와는 달리, 요한은 ‘공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의도는 그리스도의 경이로움에 대한 우주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분명 고전적인 철학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성부(聖父)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존재하며, 시간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까마득히 넘어선 곳에 있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직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는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파견자로서의 지위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결정론적인 구도에서 그리스도를 암살한 것은 단지 아들이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기계적인 장치에 불과할 뿐이다.
요한의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의 상당 부분을 빠뜨리고 있으며, 모든 역경은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모든 것을 미리 알았던 존재)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Es ist vollbracht!(모두 이루어졌다)’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요한의 관념에서 부정적인 면은 유대인들이 영원히 저주받았다는 견해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심판장 바깥의 낮은 곳에 있으며,
자애롭게 보이는 총독에게 ‘왕’을 사칭하는 자를 죽이라고 구슬리는 것도 이들 유대인들이다.
 
첫 합창곡의 자유시는 작품의 요한적인 주제, 즉 영원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하느님의 진정한 아드님인 그리스도에게 수난의 가장 비참한 순간에서조차 당신이 얼마나 영광을 받는가를 보여 달라고 탄원한다.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을 하나로 묶은 또 하나의 예는(흥미롭게도 역시 다 카포 구조로 되어 있다) ‘모두 이루어졌다’로, 이 곡의 중간 부분은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묘사하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바흐 수난곡의 중심이자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정수는 코랄 ‘주님의 고난이 있었기에(Durch dein Gef?ngnis)’이다. 이 곡은 다시 한 번 이러한 모순을 탐구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가 체포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바흐의 요한 수난곡에 담긴 정교한 상징적 구조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확실히 그런 식의 구조는 당시의 지성적, 종교적 환경에서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자들이 제시한 어떤 균형도 ‘상상력에 의한’ 추측 없이는 이끌어낼 수 없다. 게다가 상징적인 구조를 입증한다고 해도 그것이 음악에 미치는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다.
상징적인 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수난 사건의 무자비함이다. 모든 것이 시계처럼 정확하게 일어나며,
미리 운명 지어진?사실상 예언된?순서를 직접적, 필연적으로 성취하는 것일 따름이다. 재판 장면은 요한의 서술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이 유대인들에 의해 판정받기 때문이다(그릇되게, 그렇기 때문에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투르바 합창곡들(특히 첫 번째 ‘나사렛 예수’에서 따온 곡들) 사이의 음악적 관계가 또 다른 상징적인 차원을 담고 있든 아니든 간에,
이 곡을 처음 들었던 당대인들은 작품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필연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많은 합창곡들이 이미 익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판자들은 요한 수난곡이 좀 더 유명한 자매 작품인 마태 수난곡에 비해 세련미가 부족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확실히 요한 수난곡은 일관성 있게 흘러가지는 않으며, 거의 교조적으로 이어지는 서술-아리오소-아리아 구조(마태 수난곡은 설교의 풍미나 심지어 영성적인 경험을 선사한다)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만약 재판 장면이 아리오소와 아리아 사이에 끼여 있었다면 그 효과는 사라졌을 것이다.
레치타티보의 강렬한 음악적 색깔 입히기(베드로의 라멘트와 그리스도에 대한 채찍질은 마태 수난곡에 나오는 같은 장면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와
합창곡의 예리한 구조(거의 현대적인 스틸레 콘치타토에 가깝다)는 가사의 기복을 그대로 따라갔던 17세기 후반 루터교회 음악 양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직 아리아들, 그리고 첫 번째와 마지막 합창곡만이 바흐 성숙기 작품의 정제된 정서를 보여줄 뿐이다.


PERFORMANCE PRACTICE

요한 수난곡의 역사는 바흐의 대형 작품들 중에서 가장 복잡하다.
독창적이고 완벽한 걸작으로서의 작품을 전해주는 단 하나의 결정판 악보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요한 수난곡의 첫 번째 판본과 마지막 판본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면 어쩌면 이것이 바흐가 선호했던 작품 구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당시 작곡가들이 그런 종류의 구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우리는 대단히 정제된 1749년의 마지막 판본을 녹음의 기본으로 삼았다.
물론 이런 수정 작업의 상당수는 어쩌면 갑작스러운 상황이나 다양한 연주를 둘러싼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가령 ‘오 나의 영혼이여(Betrachte, meine Seel)’의 세 번째 및 네 번째 판본 연주보에서 류트와 비올라 다모레를 대신하는 오르간과 약음기 낀 바이올린을 예로 들 수 있다.
게다가 이 아리오소와 두 개의 다른 아리아의 마지막 판본에는 가사가 다른 부분이 있다.
하지만 모든 판본을 마구 섞어서 오늘날의 어떤 이들은 ‘최고의’ 악보라고 부를 법한 판본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흐 생전에 이루어졌던 어떤 판본이나 연주와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바흐가 후기 판본에서 했던 수정 작업의 상당수는 사실상 단순히 주변 여건에 맞추는 것보다는 작품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 중 예를 들어보자면, 음표에 가해진 많은 수정 작업, ‘주님,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Zerfließe, mein Herze)’에서 플루트에 덧붙여진 약음기 낀 바이올린,
그리고 합창곡과 코랄 및 네 곡의 아리아와 아리오소의 몇몇 특정 부분에 지시되어 있는 ‘바소노 그로소(Bassono grosso)’ 등이 있다.
이 악기가 정말 16' 콘트라바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그것이 1749년 당시 쓰이고 있었던 대형 악기를 의미한다는 것은 틀림 없다.
 
바흐가 교회 음악에서 하프시코드를 썼던 사실은 오랫동안 논쟁 거리였다.
요한 수난곡의 1749년 판본은 실제로 파트에 ‘쳄발로(cembalo)’라고 표기되어 있고 또 모든 악장에 통주저음이 붙어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1724년의 첫 번째 연주에서 바흐가 하프시코드 상태에 대해서 불평했던 것 역시 이 작품의 악기 구성에서 언제나 하프시코드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로렌스 드레이퍼스(Laurence Dreyfus)는 바흐가 교회 음악에서 자주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을 동시에 연주하도록 요구했다고 주장했는데, 우리 또한 이런 연주 관습을 채택했다.
하지만 ‘오 나의 영혼이여(Betrachte, meine Seel)’의 경우는 상당히 모호한데,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파트에 모두 오블리가토 파트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흐가 노년의 필체로 오르간 파트에 오블리가토를 덧붙인 것을 보면 마지막 판본에서는 오르간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
 
요한 수난곡의 마지막 판본을 위한 연주보가 대부분 완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악보를 실제로 어떻게 연주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리 녹음에서 현악 파트는 바흐가 1730년에 제대로 갖춘 교회음악에 대해서 쓴 원고에 있는 설명(바이올린 파트 당 ‘두 명 내지 세 명’의 연주자와 각각 두 명의 비올라 및
첼로 연주자)을 따랐다. 하지만 이 원고가 성악 편성에 있어서도 바흐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형태에 대해 기악 파트만큼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조슈아 리프킨(Joshua Rifkin)은 원고에서 언급하고 있는 12명(혹은 심지어 16명)의 가수들은 합창단이 아니라 바흐가 쓰기를 희망했던 가수들의 전체 명단이나 이용 가능 인력을 나타내며, 바흐의 ‘합창’ 음악 대부분은 단지 네 명의 가수들, 그리고 때로는 여기에 선택 사양으로 덧붙이는 ‘리피에노’ 가수 네 명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성부당 몇 명의 가수가 연주에 참가했는가에 대한 단 하나의 믿을 만한 징후는 개별 작품의 연주보의 내부 구성 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각각의 파트보 숫자만큼 가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 수난곡의 경우에는 성부 당 두 명의 가수가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의 主가수, 또는 ‘콘체르티스트(concertist)’가 대개 해당 성역의 독창도 맡았다. 우리는 여기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 소프라노 파트에 ‘리피에노’ 가수 한 명을 더했고 복음사가와 예수 역을 맡은 가수를 따로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소프라노와 알토 파트를 중복하는 ‘리피에노’ 가수는 소년 가수들이 맡았다. ‘현대적인’ 소년 가수들과 여성 가수들이 함께 노래하면서 생기는 효과가 바흐가 자신의 소년 학생들(10대 후반에도 높은 성부를 노래할 수 있었다)로부터 기대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음향과 민첩함, 통찰력에 근접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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