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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1일에 교황 레오 13세(재위 : 1878~1903)는 회칙<수프레미 아포스톨라투스> (Supremi Apostolatus)를 통해서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하고 개인과 가정 성화, 인류 구원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묵주 기도를 바치는 달로 정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성모님께 의탁하며 전 세계 그리스도교 국가와 하느님 교회의 백성들에게 구원 신비를 담은 로사리오라는 무기를 손에 잡고 험난한 시대에 평화와 구원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희망하였다. 또 신자들에게 오류가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진리와 사랑 안에서 묵주기도를 묵주기도 성월뿐 아니라 연중 언제나 끊임없이 바치기를 권고하였다.

“본인은 진심으로 신자들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집에서나 가정에서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기를 권고할 뿐 아니라, 또한 금년도 10월 한 달이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에게 봉헌되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묵주기도 성월을 설정한 것은 로사리오 축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세기에 교회가 분열된 틈을 타서 터키의 이슬람교도들이 로마를 침공해 왔는데, 이때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의 제왕들과 함께 공동 방어를 다짐하고 연합군을 편성하였다. 1571년 10월 7일 성모 마리아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며 전쟁터에 나간 그리스도교 연합군들은 코린토만의 레판토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한 성 비오 5세는 해마다 10월 7일에 로사리오 축일을 거행하였다. 개정된 용어로 10월 7일 로사리오 축일은,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낸다.

라틴어 로사리움(rosarium) 또는 로사리오(rosario)는 ‘장미화관’, ‘장미 꽃다발’이란 뜻을 지니며
묵주(默珠), 혹은 묵주기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교인들은 ‘자신을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쓰는 관습이 있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 관습을 수용, 기도 대신 장미 꽃다발을 하느님께 바치기도 하였으며, 특히 로마제국의 박해 당시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에 끌려가 사자의 먹이가 될 때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데 합당한 예모’라고 생각하고 머리에 장미 꽃으로 엮은 관을 썼다. 이 때 박해를 피한 신자들은 밤중에 몰래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면서 순교자들이 썼던 관을 한데 모아 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한 가지씩 바쳤다고 한다.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나 독수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시편을 50편이나 100편, 또는 150편을 매일 외웠는데,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을 머리에 쓰는 관처럼 둥글게 엮어 기도 횟수를 세었다고 한다. 이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편 대신 주의 기도를 그 수만큼 바쳤는데, 수를 셀 때 열매나 구슬 150개를 노끈이나 가는 줄에 꿰어 사용하였다. 이러한 관습들이 묵주기도를 탄생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2세기 삼종 기도가 널리 보급되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도 깊어져 주의 기도 대신 성모송을 50번이나 150번 외우기도 하였는데, 이를 성모의 시편이라고 하였다. 그 후 열 번째 묵주 알을 좀 더 크게 하여 마치 시편의 후렴처럼 주의 기도를 바쳤다. 이때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는데, 그중에 5가지 기쁨, 즉 성모 영보, 예수 탄생, 예수 부활, 예수 승천, 성모 승천 등을 묵상하면서 성모송을 되풀이하였다. 그 후에는 성모 칠락(七樂)을 묵상하다가 시편 150편을 15단으로 나누어 외우듯이 15가지 기쁨을 묵상하기 시작하였다.

13세기경부터는 영광송이 삽입되었다. 처음에는 성모송마다, 그 후부터는 성모송 열 번마다 영광송을 하였는데, 이것은 성무일도 시편을 기도할 때 하는 영광송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 당시 알비파 이단의 세력이 교회를 위협하며 툴루즈 지방을 침략하자, 성 도미니코(St. Dominicus, 1170~1221)는 묵주기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으며 알비파 이단의 세력도 점차 축소되었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마리아의 환희에 대한 묵상을 ‘묵주기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3~14세기경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성모의 종 수도회가 성모의 다섯 가지 고통에 대한 신심과 성모 칠고(七苦)와 칠락(七樂)을 널리 전파하였는데, 이때의 묵주기도는 ‘성모께 대한 아름다운 시’ 혹은 ‘상념(想念)들을 묶은 꽃다발’을 의미하였다. 또 아베마리아의 리듬에 맞추어 50번 혹은 100번의 성모송을 연속적으로 바치는 것을 ‘마리아의 묵주기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오늘 같은 두 가지 형태의 묵주기도가 등장한 것은 15세기에 와서이다. 하나는 150번의 성모송을 연속적으로 바치면서 예수나 마리아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순간들을 묵상하는 ‘도미니코 묵주기도’이다. 예를 들어 “태중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되시도다.”, “천사의 알림이었도다.”, “성령으로 잉태하셨도다.” 등이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알랑 드 라 로슈(Alan de la Roche) 수사는 1464년 그 신비를 강생과 수난, 부활에 따른 환희, 고통과 영광 등의 세 묶음으로 나누었는데, 그 후 일반에 퍼져 나가 15세기 말경에는 전통적인 신비 15단이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묵주기도이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 묵주기도’인데, 도미니코 묵주기도보다 역사적으로는 앞섰으나 신자들에게 널리 전파되지는 않았다. 이 기도는 주로 성모의 칠락을 묵상하였기에 ‘칠락 묵주기도’ 또는 ‘칠단 묵주’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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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요안나입니다,
저는 광주 교구 송정2동 원동 본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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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렸을때 신동에 다녔다가
현제는 원동에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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