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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고태환 |
방송을 위한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
“여러 악기를 연주하시는데 부모님은 어떤 악기를 전공하셨나요?”
“제 아버님은 오뎅장수인데요.”
새마을운동으로 생긴 연쇄점 때문에 시골 오일장이 무너졌고, 장돌뱅이 식료품 잡화상마저 파산한 아버지는 무작정 상경해 영등포 무허가 시장 안, 남의 집 추녀 앞을 세내어 오뎅 장사를 시작하셨다. 다 팔리지 않는 날은 저녁 대신으로 오뎅을 먹었다. 내가 더 이상 오뎅을 먹지 않는 이유다.
어느 수녀회의 초청으로 성소에 관한 강의를 한 후에 한 분이 내게 물었다.
“혹시 동생이 수녀님이시지 않나요? 언젠가 함께 피정을 했는데, 나눔 시간에 아버지가 오뎅장수라고 했거든요.”
‘엿장수 아들’이라고 놀림 받았던 아픈 기억 때문에 하마터면 성소를 포기할 뻔 했던 한 신학생은 어렵게 사제가 되어 가난한 노인들을 아버지로 여기며 잘 살고 있다. 그가 가장 힘들어했을 때 함께 껴안고 울고 나서 형제가 되었다.
해외 한인성당의 초청강의에서 그런 내용을 나누었는데, 마침 쉬러 오셨던 신부님의 부모님께서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연탄장수였어요.”
아들신부를 앞에 두고 하신 이 말씀은 아들의 삶을 겸손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을 떠난 후 신부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는데 제목이 이랬다.
‘연탄장수 아들인 동생신부가 오뎅장수 아들인 형님께.’
그 해 대림절에 서울 근교의 어느 본당에서 ‘낮아짐과 망가짐으로 오신 하느님’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끝낸 후, 강복을 하러 나오신 본당신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 아버님께서 오늘처럼 많이 웃으시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평생을 개장수로 살아오신 아버님께 웃음을 되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순간 큰 성당에 가득 앉아계시던 교우들이 웃음을 멈추고 잠시 숙연해졌다. 그 신부님과도 형 아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렇게 맺어진 무촌 4형제의 맏형은 평신도인 김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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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고태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위원이며, 가톨릭뉴스<지금여기>의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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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글이다 싶어서 성가방 가족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좋아요.
아름다운글 올려 줘서 감사합니다.
참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글입니다.
똥폼 잡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