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했냐?" "아니요"
"때렸냐?" "아니요"
"죽였냐?" "... 아... 아니요... ㅡ ㅡ;;;;;"
"그런데 어째서 그게 죄냐? 그건 죄가 아니야. 넌 지금 '감정'과 '행동'을 혼동하고 있어" "...."
고해성사 들어가서 나와 신부님과의 대화다.
생각으로 누군가를 심하게 '미워한 죄'.. 그거.. 죄 아닌가? 아무리 종교가 같아도 동서양의 문화가 달라서인가? 하고 미국신부님 대신 한달뒤 한국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드렸다.
한국 신부님 역시 내가 고백한 내용을 '죄'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신부님, 그러면 이런 상황에는 고백성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까?" 라고 여쭈었더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지 않고는 자매님과 주님과의 문제이지요" 라고 성령께로부터 오는 지혜로 '우문현답' 하시는 신부님.
예를 든다면 자신의 어린 자녀를 성폭행한 추악한 범인을 마음속으로 증오하고 미워했다고해서 그것을 '죄'라고 몰아붙인다면... 쩜.. 거시기..하지 않은가...?
이웃의 이기적인 행동에 무관심과 배려하지 않는 이 모든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위해 내 마음에 돋은 뾰족한 가시들. 왜 '정당방위'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신부님 말씀대로 아마 이건 '죄'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께로 다가가는데에는 확실한 '걸림돌'이다.
이웃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이 가시가 주님께로 다가갈때마다 주님을 얼마나 아프게했나를 생각한다면 '몰상식한 이웃'때문이 아니라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때문에 그래서 '용서'를 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를 보호하기위해 돋은 가시. 죽을 각오를 하고 잘라내지 않는 한 주님을 계속 아프게 할 것이다.
가시는 잘라내도 머리카락처럼 또 자란다. 내 보호막인 가시가 자랄때마다 매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또 잘라내지 않는 한 난 주님을 계속 아프게 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렇게 혼자 거룩한척 매일미사 매일 기도로 포장을 하고 있었지만 항상 주님께 다가가기가 힘들고 껄끄럽기만 했었는데 '주님을 향한 서툰 사랑'이 조금씩 눈을 뜨려하니 '희망'의 빛이 보였다.
+ 깨달음으로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주님, 나를 아프게 하는 이웃을 보며 '절망'하지않고 나로 인하여 아파하시는 주님만을 보며 '희망'만 안고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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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rosaca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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